동양철학 2강. 노자와 장자
유가가 사람을 다시 만들자고 할 때, 도가는 되묻습니다. 그 "만듦" 자체가 병의 원인 아니냐고요.
풀고 시작
도덕경: 이름 붙일 수 없는 것
『도덕경(道德經)』의 저자는 누구일까요? 전통적으로는 노자(老子)의 저작으로 전해지지만, 노자가 실존 인물인지, 책이 한 사람의 작품인지는 오래된 논쟁거리입니다. 현대 학계는 대체로 전국시대에 걸쳐 형성된 편집물로 보고, 1993년 곽점(郭店)에서 출토된 죽간본은 기원전 300년경에 이미 그 일부가 유통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저자 논쟁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책의 첫 문장입니다. 첫 문장이 전체 사상의 예고편이거든요. "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으면 그것은 항상된 도가 아니다(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도(道)는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고 그에 따라 움직이는 근원이자 길이지만, 언어와 개념의 그물에 잡히지 않습니다. 여기서 도가 특유의 언어 회의가 나옵니다. 이름은 세계를 자르고 구분하는데, 도는 구분 이전의 전체이기 때문이죠. 도를 따르는 삶의 방식이 무위(無爲)입니다. 무위는 게으름이 아니라 작위 없음, 곧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고 사물의 결을 따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도는 항상 무위하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도상무위 이무불위, 道常無爲 而無不爲)"라고 하죠.
상선약수: 낮음과 부드러움의 역설
노자의 가치 전도를 압축한 구절이 8장입니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상선약수, 上善若水).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 다투지 않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죠. 물은 부드럽지만 바위를 뚫고, 낮은 곳으로 흐르기에 결국 모든 골짜기의 왕이 됩니다. 강함과 높음과 채움을 추구하는 통념에 맞서 노자는 약함과 낮음과 비움이 오히려 이기는 길이라는 역설을 폅니다. 이는 처세술로도 읽히지만, 존재론적 주장이기도 합니다. 유(有)가 쓸모를 갖는 것은 무(無) 덕분입니다. 그릇이 그릇인 것은 빈 공간 때문이고, 방이 방인 것은 뚫린 문과 창 때문이죠.
이 관점에서 노자는 유가를 정면 비판합니다. "큰 도가 무너지자 인의(仁義)가 생겨났다(대도폐 유인의, 大道廢 有仁義)"라고요. 인과 의와 예 같은 덕목의 등장은 문명의 성취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도가 이미 상실되었다는 증상입니다. 도덕을 소리 높여 가르쳐야 하는 사회는 이미 병든 사회라는 진단이고, 처방은 "성스러움을 끊고 지혜를 버리는 것(절성기지, 絶聖棄智)"입니다.
장자: 소요유와 호접몽
장자(莊子, 기원전 369?~286?)는 도가의 문제의식을 개인의 정신적 자유로 밀고 갑니다. 『장자(莊子)』 내편의 첫 편이 소요유(逍遙遊), 곧 "얽매임 없이 노닒"입니다. 구만리를 날아오르는 붕(鵬)새와 그것을 비웃는 매미의 우화는, 크고 작은 관점의 상대성과 함께, 쓸모와 명예의 그물에서 풀려난 정신의 활공을 그립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제물론 편 끝의 호접몽(胡蝶夢)입니다. "언젠가 장주(莊周)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나는 나비였고 스스로 유쾌하여 자기가 장주임을 알지 못했다. 문득 깨어나니 틀림없이 장주였다. 장주가 나비 꿈을 꾼 것인가, 나비가 장주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어디서 본 듯한 물음이지 않나요? 데카르트의 꿈 논증(합리론 1강)과 겉모습이 닮았습니다. 깨어 있음과 꿈을 내부에서 판별할 기준이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이 회의를 넘어설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 했지만, 장자는 판별 불가능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즐깁니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분명 구분이 있으되, 그것을 "만물의 변화(물화, 物化)"라 부를 뿐이죠. 회의가 불안이 아니라 해방의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판단 유보로 평정에 이르려 한 고대 회의주의와의 비교가 학계에서 자주 논의됩니다.
제물론: 만물을 고르게 하다
제물론(齊物論)의 핵심 주장은 만물제동(萬物齊同), 곧 도의 관점에서 보면 만물의 시비와 미추와 귀천의 구분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장자가 드는 예가 재미있습니다. 사람은 습한 데서 자면 병들지만 미꾸라지는 그곳이 집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올바른 거처"일까요? 모든 판단은 판단자의 자리에서만 성립합니다. "이것 또한 저것이고 저것 또한 이것이다(시역피야 피역시야, 是亦彼也 彼亦是也)"라는 말이 그 요약이죠. 그런데 장자의 이 상대주의가 어디까지 가는지는 해석 논쟁의 중심입니다. 모든 판단이 동등하다는 강한 상대주의로 읽는 학자도 있고, 그레이엄(A. C. Graham)이나 한센(Chad Hansen)처럼 특정 관점에 대한 집착을 치료하는 관점주의적 치료로 읽는 학자도 있습니다. 후자로 읽으면 장자는 "아무래도 좋다"가 아니라 "네 잣대가 유일한 잣대라는 확신을 내려놓아라"를 말하는 셈이죠.
여기서 쓸모없음의 쓸모(무용지용, 無用之用)가 나옵니다. 옹이투성이라 목수가 거들떠보지 않은 나무는 바로 그 쓸모없음 덕분에 베이지 않고 천수를 누립니다. 유용성의 잣대 자체가 하나의 관점일 뿐이고, 그 잣대에서 벗어나는 것이 생존이자 자유라는 것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무위의 정치는 오늘날의 규제 완화 논리와 같을까요, 다를까요? 다르다면 어디서 갈라질까요?
- 장자의 관점 상대주의를 받아들이면, 고문이나 학살에 대한 비판도 "하나의 관점"으로 무력해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