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4강. 내재주의와 외재주의: 정당화는 누구의 것인가
정당화는 머릿속에서 접근 가능해야 할까요, 아니면 세계 쪽의 신뢰성이면 충분할까요?
풀고 시작
갈림길의 질문
3강에서는 정당화의 구조를 물었습니다. 이번엔 정당화의 소재지를 묻습니다. 믿음이 정당화되려면, 그 정당화 요인이 주체가 반성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증거, 이유, 다른 믿음)이어야 할까요? 아니면 주체가 모르더라도 사실로서 성립하는 관계(과정의 신뢰성)면 될까요? 전자가 내재주의, 후자가 외재주의입니다.
내재주의: 이유를 가진 자만 정당화된다
내재주의는 전통 인식론(데카르트부터 치좀까지)의 기본값이었습니다. 정당화는 책임의 개념이라는 거죠. 자기 믿음에 대해 이유를 댈 수 있어야 하고, 그 이유는 1인칭 관점에서 접근 가능해야 합니다. 근거 없이 옳게 믿는 것은 운이지 인식적 성취가 아니니까요.
그런데 난점이 있습니다. 요구가 너무 높다는 겁니다. 어린이와 동물은 이유를 반성하지 못하니 정당화된 믿음이 없는 걸까요? 우리 대부분은 "지구가 돈다"의 증거조차 제시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소급 문제도 있습니다. 이유의 이유를 계속 접근 가능하게 요구하면 트릴레마가 재발합니다.
외재주의: 신빙주의
외재주의의 대표는 골드만의 신빙주의(reliabilism)입니다. 믿음이 정당화된다는 것은 신뢰할 만한(참을 높은 비율로 산출하는) 인지 과정에서 생산되었다는 것입니다. 시각, 기억, 좋은 추론은 신뢰 과정이고, 소망적 사고나 점괘는 아니죠. 핵심은, 주체가 그 신뢰성을 알 필요가 없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어린이·동물의 지식이 자연스럽게 복권되고, 인식론이 심리학·인지과학과 연속적인 자연화된 인식론(콰인)의 흐름과 합류합니다.
그런데 외재주의에도 강펀치가 두 방 날아옵니다.
첫째, 새로운 악마 문제입니다. 악마에게 속는 희생자는 우리와 내적으로 완전히 동일한 증거·추론을 갖지만, 그의 과정은 (그 세계에서) 신뢰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그는 정당화가 없는 걸까요? 직관은 "우리만큼 정당화된다"고 말합니다. 내적 합리성이 정당화의 핵심이라는 내재주의 직관의 반격이죠.
둘째, 일반성 문제입니다. "그 과정"이 대체 어떤 유형일까요? 같은 지각도 "시각 일반"(신뢰 높음), "어두운 곳에서의 시각"(낮음), "화요일의 시각"(?)으로 기술할 수 있고, 유형을 어떻게 자르느냐에 따라 신뢰도가 널뜁니다. 유형 선택의 비자의적 기준이 아직 없습니다.
절충과 확장
그럼 승부는 어떻게 났을까요? 몇 가지 절충과 확장이 지형을 이룹니다.
- 정당화 개념이 사실 두 개라는 분업 진단이 있습니다. 의무 이행으로서의 정당화(내재)와 참 산출 연관으로서의 정당화(외재)는 서로 다른 질문에 답한다는 겁니다.
- 덕 인식론은 믿음 평가의 단위를 과정이 아니라 인식 주체의 성품으로 옮깁니다. 지식이란 인식적 덕(지각의 예리함, 지적 성실성, 개방성)의 발휘로 얻은 참 믿음이라는 거죠(소사, 자그젭스키). 게티어 문제에도 "운이 아니라 덕에 귀속 가능한 참"이라는 답을 제공하고, 윤리학의 덕 이론과 평행선을 이룹니다.
- 대략의 현재 지형은 이렇습니다. 지식(knowledge)에 대해서는 외재주의가, 합리성(rationality) 평가에서는 내재주의가 우세합니다.
다음 강은 개인을 넘어갑니다. 우리 지식의 대부분은 남에게 들은 것이죠. 증언은 어떻게 지식이 될까요?
인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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