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철학 3강. 플라톤: 이데아론과 동굴의 비유
눈에 보이는 세계는 진짜의 그림자입니다. 서양철학사 전체가 이 한 주장에 대한 각주라 불리죠.
풀고 시작
두 스승의 종합
플라톤(기원전 427~347)은 두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소크라테스에게서 "정의란 무엇인가" 같은 보편적 정의에 대한 질문을,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에게서 변화하는 감각 세계와 불변하는 존재의 대립을 받았죠. 이데아론은 이 둘을 한 번에 푸는 수입니다.
방법은 과감합니다. 세계를 둘로 나누는 것이죠. 감각으로 만나는 현상계는 끊임없이 변하고(헤라클레이토스가 옳은 영역),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이데아계는 완전하고 불변합니다(파르메니데스가 옳은 영역). 아름다운 것들은 시들지만 아름다움 자체(이데아)는 시들지 않습니다. 개별 사물은 이데아를 나눠 갖는(분유) 만큼만 그것답고요. 소크라테스가 찾던 "정의 자체", "용기 자체"가 바로 이데아입니다.
앎은 상기다
그런데 이데아를 감각으로 볼 수 없다면 대체 어떻게 알까요? 플라톤의 답은 이렇습니다. 영혼은 태어나기 전 이데아계를 보았고, 배움이란 잊은 것을 다시 떠올리는 것(상기, anamnesis)이라는 겁니다. 『메논』에서 소크라테스는 기하학을 배운 적 없는 노예 소년이 질문만으로 피타고라스 정리에 도달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지식이 주입이 아니라 인출이라는 이 그림은 산파술의 형이상학적 근거가 되죠.
동굴의 비유
『국가』 7권의 유명한 장면입니다. 죄수들이 동굴 벽만 보도록 묶여 있습니다. 등 뒤 불빛이 만드는 그림자를 이들은 실재라 믿죠. 한 죄수가 풀려나 몸을 돌리면 처음엔 눈이 부셔 고통스럽습니다. 동굴 밖으로 끌려 나가 마침내 태양(좋음의 이데아)을 봅니다. 그리고 동굴로 돌아가죠. 어둠에 적응 못 해 더듬거리는 그를 남은 죄수들은 비웃고, 자신들을 풀어주려는 그를 죽이려 합니다.
각 요소가 정확히 대응합니다. 그림자는 감각과 통념이고, 돌아섬은 교육(파이데이아)이며, 눈부심의 고통은 배움의 고통입니다. 태양은 좋음의 이데아이고, 돌아온 자를 죽이려 하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재판이죠. 교육이란 정보 주입이 아니라 영혼 전체의 방향 전환이라는 것이 이 비유의 교육론입니다.
이데아론의 문제들
놀랍게도 가장 날카로운 반론을 정리한 사람은 플라톤 자신입니다. 후기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에서 묻죠. 진흙이나 머리카락의 이데아도 있을까요? 개별자와 이데아의 닮음을 설명하려면 둘을 닮게 하는 제3의 이데아가 필요하고, 이는 무한퇴행합니다(제3인간 논증). 그리고 가장 강한 비판자는 제자였습니다. "나는 스승을 사랑하지만 진리를 더 사랑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5강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인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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