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론 1강. 로크: 백지에서 시작하는 마음
본유관념은 없습니다. 태어날 때 마음은 백지이고, 경험이 그 위에 씁니다.
풀고 시작
경험론의 선언
로크(1632~1704)는 의사이자 정치 사상가였고, 명예혁명의 이론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인간지성론』(1689)의 기획은 의외로 겸손합니다. 거창한 형이상학 체계를 세우기 전에, 인간 지성이라는 도구의 성능부터 검사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고, 어디부터는 알 수 없는 걸까요.
첫 작업이 본유관념 철거입니다. 마음은 백지(tabula rasa)로 태어납니다. 모든 관념의 출처는 경험이며, 경험은 두 갈래로 들어옵니다. 외부 사물에 대한 지각인 감각과, 마음 자신의 작용에 대한 지각인 반성입니다. 이제 경험론의 게임 규칙이 정해졌습니다. 어떤 관념이든 그 출처를 경험에서 대라. 대지 못하면 그 관념은 의심스럽다. 이 규칙 하나가 버클리와 흄을 거치며 점점 날카로운 칼이 되어 갑니다.
제1성질과 제2성질
로크는 물체의 성질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 제1성질은 연장, 모양, 운동, 수입니다. 물체 자체에 실재하며, 우리 관념이 그것을 닮았다고 봅니다.
- 제2성질은 색, 소리, 맛, 냄새입니다. 물체에는 그런 것 자체가 없고, 제1성질의 배열이 우리 안에 그런 감각을 일으키는 힘만 있습니다. 장미의 붉음은 장미가 아니라 지각 속에 있는 셈이죠.
근거는 과학과 상대성 논증입니다. 미지근한 물이 한 손에는 따뜻하고 다른 손에는 차갑게 느껴집니다. 물 자체가 동시에 두 온도일 수는 없으니, 따뜻함은 지각의 사건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이 구분은 당대 입자 물리학(보일, 뉴턴)의 철학 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시한폭탄이 하나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것이 관념뿐이라면, 관념 너머의 "물체 자체"(로크 스스로 "무엇인지 모르는 어떤 것", 즉 실체라 불렀습니다)를 대체 어떻게 안다는 걸까요. 이 폭탄의 뇌관을 뽑는 사람이 버클리입니다(다음 강에서 만납니다).
인격 동일성: 기억이 나를 만든다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로크의 답은 혁신적입니다. 영혼 실체도 몸도 아닌 의식의 연속성(기억)이라는 것입니다. 왕자의 의식이 구두수선공의 몸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왕자입니다. 인격(person)은 법적·도덕적 개념이며, 책임은 의식이 미치는 곳까지만 미칩니다.
반박도 즉시 나왔습니다. 리드의 장교 논증을 볼까요. 소년 시절을 기억하는 청년 장교가 있고, 청년 시절만 기억하는 노장군이 있습니다. 기억 기준으로는 노장군 = 청년이고 청년 = 소년인데, 정작 노장군 ≠ 소년이 되어 동일성의 이행성이 깨져 버립니다. 이 논쟁은 지금도 심리철학·윤리학의 현역입니다. 치매 환자의 약속은 과연 누구의 약속일까요.
정치철학 보너스: 저항권
『통치론』에서 로크는 자연 상태의 인간이 생명·자유·재산의 자연권을 가지며, 정부는 이를 보호하려는 신탁이라고 주장합니다. 신탁을 배반한 정부에 대한 저항권은 정당합니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이 문장들의 표절에 가깝습니다. 백지설과 저항권은 사실 한 세트입니다. 타고난 왕도 타고난 노예도 없다면, 정당성은 오직 동의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