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3강. 정당화의 구조: 토대론과 정합론
근거의 근거를 계속 물으면 어디서 멈출까요? 지식은 건물일까요, 그물일까요, 아니면 애초에 잘못된 그림일까요?
풀고 시작
아그리파의 트릴레마
아이가 "왜?"를 끝없이 묻는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 모든 믿음에 근거를 요구하면 세 갈래 중 하나로 끝납니다. 독단적 중단(더는 근거 없이 멈춤), 무한 소급(영원히 근거의 근거), 순환(근거가 제자리로 돌아옴). 셋 다 나빠 보이죠. 고대 회의주의자 아그리파가 정식화한 이 트릴레마에 대한 두 가지 대답이 현대 인식론의 양대 구조론입니다.
토대론: 지식은 건물이다
토대론(foundationalism)은 중단을 명예롭게 만듭니다. 어떤 믿음들은 다른 믿음의 지지 없이 스스로 정당화되는 기초 믿음이며, 나머지는 그 위에 세워진다는 겁니다. 데카르트의 코기토가 고전적 기초였고, 경험론에서는 감각 소여("지금 빨갛게 보인다")가 후보였습니다. 기초는 오류 불가능해 보입니다. 세계에 대해서는 틀려도 "그렇게 보인다"는 것 자체는 틀리기 어려우니까요.
그런데 이 견고해 보이는 토대에 강력한 공격이 들어옵니다. 셀라스의 "소여의 신화" 비판이 유명합니다. 감각 경험이 개념 이전의 순수 소여라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어서 다른 믿음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관계에 들어갈 수 없고, 개념적 내용을 가진다면 이미 해석이 섞여 오류 가능해집니다. 기초는 정당화를 주기엔 벙어리고, 말을 하는 순간 특권을 잃는다는 딜레마죠. 그래서 현대 토대론은 기초의 오류 불가능성을 포기하고 "잠정적으로 정당화된(prima facie)" 온건한 기초로 후퇴해 있습니다.
정합론: 지식은 그물이다
정합론(coherentism)은 반대로 순환을 재해석합니다. 정당화는 사슬이 아니라 그물이라는 겁니다. 개별 믿음은 기초에 닿아서가 아니라 믿음 체계 전체와 정합해서(무모순 + 설명적 연결 + 상호 지지) 정당화됩니다. 작은 원은 악순환이지만, 크고 촘촘한 상호 지지망은 다르다는 거죠. 노이라트의 비유가 이 진영의 표어입니다. "우리는 항해 중에 배를 수리하는 선원이다." 마른 부두(확실한 토대)는 없습니다. 어느 판자든 다른 판자들을 딛고 갈아 끼울 뿐입니다.
정합론에도 아픈 공격이 있습니다. 바로 고립 반론입니다. 완벽하게 정합적인 소설도 얼마든지 가능하잖아요? 체계가 아무리 아름답게 짜여도 세계와 닿는 입력이 없으면 참과 무슨 상관이냐는 겁니다. 또 상호 모순인 두 체계가 각자 정합적일 수 있다는 지적(대안 체계 반론)도 있습니다. 정합론자는 "지각 입력의 비중을 높인 정합"으로 응수하는데, 그러면 토대론과의 거리가 줄어듭니다.
수렴과 제3의 길
실제 논쟁의 귀결은 흥미롭게도 수렴입니다. 온건 토대론(기초는 오류 가능하고 정합에 의해 강화됨)과 입력 강조 정합론(지각에 특별 가중치)은 상당히 닮아 있습니다. 하만의 반성적 평형(윤리학 방법론으로 유명한 롤스의 용어이기도 합니다)이나, 수전 하크의 토대정합론(십자말풀이 비유: 단서=경험 입력, 기존 칸=배경 믿음)이 그 수렴 지점의 이름들입니다.
트릴레마의 남은 갈래(무한 소급)를 명예화하는 무한주의(클라인)도 소수파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정당화 구조 논쟁은 다음 강의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정당화는 애초에 주체의 관점 안에 있어야 할까요(내재주의), 아니면 신뢰할 만한 과정이면 충분할까요(외재주의)?
인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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