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2강. 회의주의: 통 속의 뇌와 그 대응들
당신이 통 속의 뇌가 아님을 증명할 수 있을까요? 못 한다면, 손이 있다는 것은 아는 걸까요?
풀고 시작
데카르트의 악마, 퍼트넘의 통
회의주의 시나리오는 시대에 맞게 업데이트되어 왔습니다. 데카르트의 꿈과 악마(합리론 1강)의 현대 버전이 바로 통 속의 뇌(BIV)입니다. 사악한 과학자가 당신의 뇌를 통에 넣고 슈퍼컴퓨터로 완벽한 가상 경험을 공급한다면, 당신의 경험은 지금과 구별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논증이 조립됩니다.
- 내가 손이 있음을 안다면, 내가 BIV가 아님을 안다. (함축을 아는 것)
- 나는 내가 BIV가 아님을 알 수 없다. (경험적 증거가 원리상 동일하므로)
- 따라서 나는 손이 있음을 알 수 없다.
전제도 그럴듯하고 형식도 타당합니다(후건부정). 일상 지식 전체가 인질이 되는 겁니다. 철학자들은 어떻게 몸값을 치렀을까요?
대응 1: 무어의 뻔뻔한 전복
G. E. 무어의 유명한 "증명"부터 보시죠. 그는 손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손이 하나 있다. 여기 또 하나 있다. 그러므로 외부 세계는 존재한다." 논점 선취처럼 보이지만 구조는 진지합니다. 회의 논증과 무어 논증은 같은 조건문을 공유합니다("손이 있음을 안다면 BIV가 아님을 안다"). 회의주의자는 "BIV임을 배제 못 한다"에서 "손을 모른다"로 내려가고, 무어는 "손이 있음을 안다"에서 "BIV가 아니다"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어느 전제가 더 확실할까요? 무어의 도박은 이겁니다. 철학적 가설(전제 2)보다 "여기 손이 있다"가 언제나 더 확실하다는 것, 어떤 회의적 논증도 그 결론보다 확실한 전제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죠.
대응 2: 퍼트넘의 의미론적 반격
퍼트넘은 더 급진적인 시도를 합니다. "나는 통 속의 뇌다"라는 문장은 참일 수 없다는 겁니다. 의미론적 외재주의(단어의 의미는 인과적 접촉이 결정한다는 입장)에 따르면, 평생 통 속인 뇌의 "나무"라는 말은 진짜 나무가 아니라 시뮬레이션 속 나무 이미지를 지시합니다. 그렇다면 그 뇌가 "나는 통 속의 뇌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자기 상황을 지시하는 데 실패하고, 따라서 거짓이 됩니다. 자기 논박적 가설이라는 거죠.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이 논증은 "지금 막 통에 들어간 뇌"는 막지 못하고, 회의적 불안의 핵심을 비껴간다는 지적입니다.
대응 3: 맥락주의
세 번째 대응은 "안다"라는 말 자체를 겨냥합니다. "안다"는 문턱이 맥락마다 달라지는 말이라는 겁니다("평평하다"가 탁구대와 활주로에서 다르듯이요). 일상 맥락에서 "손이 있음을 안다"는 참입니다(BIV 같은 가능성은 무관한 대안이니까요). 그런데 철학 세미나에서 BIV가 진지하게 거론되면 문턱이 치솟아 같은 문장이 거짓이 됩니다. 이렇게 회의주의의 힘과 일상 지식의 건재가 동시에 설명됩니다. 물론 대가도 있습니다. "안다"의 의미가 이렇게 미끄러진다는 언어적 주장 자체가 논쟁적이라는 점입니다.
회의주의의 효용
회의주의는 격파 대상이기 전에 측량 도구입니다. 지식 주장이 어디까지 버티는지 압력을 가해 보는 스트레스 테스트인 거죠. 데카르트는 그것으로 토대를 찾았고, 칸트는 인식의 구조를 다시 그렸고, 현대 인식론은 "안다"의 문법을 정밀화했습니다. 다음 강에서는 정당화가 어떤 구조로 쌓이는지(토대론 대 정합론)를 살펴봅니다.
인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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