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철학 6강. 콰인과 크립키: 도그마의 붕괴와 형이상학의 부활
콰인이 경험주의의 마지막 두 기둥을 무너뜨리자, 크립키가 그 폐허 위에서 형이상학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제거 대상이던 필연이 철학의 정식 주제로 돌아옵니다.
풀고 시작
두 도그마: 경험주의의 심장을 겨누다
스승의 체계를 가장 깊은 곳에서 무너뜨린 사람이 다름 아닌 수제자였다면 어떨까요? 콰인(W. V. O. Quine, 1908~2000)은 카르납의 제자를 자처한 하버드의 논리학자였습니다. 그런 그가 1951년 논문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로 스승의 체계를 안에서 무너뜨렸습니다. 첫째 도그마가 분석과 종합의 구분입니다. 4강에서 본 대로 이 구분은 논리실증주의의 뼈대였죠. 콰인의 공격은 집요합니다. "총각은 미혼 남성이다"가 분석적인 이유를 대 보라는 겁니다. 동의어 관계 때문이라면, 동의어란 무엇일까요? 필연적으로 교체 가능한 표현이라 답하면, 필연이란 무엇일까요? 결국 분석성으로 되돌아옵니다. 정의는 기존 동의 관계의 보고일 뿐이고, 설명의 원환은 닫히지 않습니다. 분석성은 "설명되지 않은 채 설명 노릇을 해 온" 신화라는 것입니다.
둘째 도그마가 환원주의, 곧 유의미한 문장 하나하나가 각자의 확증 경험 집합을 갖는다는 믿음입니다. 검증 원리의 전제였던 이 그림에 콰인은 뒤엠(Pierre Duhem)의 통찰을 이어 전체론(holism)을 맞세웁니다. 문장은 홀로 경험의 법정에 서지 않습니다. 실험이 예측을 배반할 때 우리는 가설, 보조 가정, 관찰 장비 이론, 극단적으로는 논리 법칙까지 포함한 그물 전체 중 어디를 고칠지 선택합니다. 논문의 유명한 구절이 이 그림을 요약합니다.
우리의 이른바 지식과 믿음의 총체는 가장자리를 따라서만 경험과 맞닿는 인공의 직물이다. 주변부의 갈등은 내부의 재조정을 부르지만, 어떤 진술을 고칠지는 전체 장(field)이 결정하며, 충분히 과감한 조정을 감수한다면 어떤 진술이든 참으로 유지될 수 있다.
경험에 직접 닿는 특권 문장도, 경험이 절대 손대지 못하는 분석 문장도 없습니다. 4강 노이라트의 배가 함대 전체로 커진 셈이죠. 수학과 논리조차 그물의 깊숙한 자리에 있을 뿐 원리상 개정 면제가 아닙니다.
번역 불확정성: 가바가이
콰인은 1960년 『말과 대상』에서 의미 개념 자체를 더 깊이 흔듭니다. 미지의 언어를 처음부터 번역하는 원초적 번역(radical translation) 상황을 상상해 보십시오. 토끼가 지나갈 때마다 원주민이 "가바가이"라고 외칩니다. 토끼로 번역하면 될까요? 관찰 가능한 자극과 동의 반응의 총체는 "토끼", "분리되지 않은 토끼 부분들", "토끼임의 시간 단면" 어느 번역과도 양립합니다. 행동의 모든 증거를 다 모아도 유일한 올바른 번역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번역 불확정성(indeterminacy of translation) 논제입니다. 콰인에게 이는 번역의 기술적 어려움이 아니라, 행동 너머에 확정된 "의미"라는 사실 자체가 없다는 존재론적 결론입니다. 5강 크립켄슈타인의 회의적 역설과 닮은꼴임을 알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반론도 강합니다. 촘스키는 번역 불확정성이 모든 과학 이론이 겪는 증거에 의한 과소결정과 다를 바 없는데 왜 의미에만 사형 선고를 내리느냐고 반문했고, 콰인의 행동주의 전제 자체가 논쟁거리입니다.
크립키: 이름은 기술의 다발이 아니다
솔 크립키(Saul Kripke, 1940~2022)의 1970년 프린스턴 강연록 『이름과 필연』(Naming and Necessity)은 분석철학의 물길을 다시 틀었습니다. 표적은 프레게-러셀 계열의 기술주의, 곧 이름의 의미가 기술구들의 다발(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인 그 사람)이라는 이론입니다. 크립키의 반박은 세 갈래입니다. 첫째, 양상 논증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를 가르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참입니다. 이름이 그 기술구와 동의어라면 이 문장은 모순이어야 하죠. 둘째, 인식 논증입니다. 괴델에 대해 아는 것이 "불완전성 정리의 증명자"뿐인 사람이 있고, 사실은 슈미트라는 무명인이 증명했고 괴델이 가로챘다고 가정해 봅시다. 기술주의라면 그 사람의 "괴델"은 슈미트를 가리켜야 하지만, 직관적으로 여전히 괴델을 가리킵니다. 셋째, 무지와 오류 논증입니다. 사람들은 지시에 성공하면서도 대상에 대해 틀린 기술만 가진 경우가 흔합니다.
크립키의 대안 그림에서 이름은 고정 지시어(rigid designator)입니다. 모든 가능세계에서 같은 대상을 가리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가 철학을 하지 않은 세계에서도 그 사람을 가리키지만,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은 세계마다 다른 사람을 고릅니다. 이름과 대상의 연결은 기술의 만족이 아니라, 최초의 명명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인과-역사적 전달 사슬로 유지됩니다. 1강의 샛별과 개밥바라기로 돌아가 볼까요? 두 이름 모두 금성의 고정 지시어이므로 "샛별은 개밥바라기다"는 참이라면 필연적으로 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관측으로 발견되었죠. 여기서 필연적 후험(necessary a posteriori) 진리라는 범주가 열립니다. 물은 H2O다, 이 책상은 그 나무로 만들어졌다 같은 진리들입니다. 칸트 이래 선험-필연, 후험-우연으로 포개져 있던 두 구분이 분리된 것입니다. 필연은 인식의 문제가 아니라 형이상학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형이상학의 부활
이 강의 시리즈의 결말은 반전입니다. 논리실증주의가 무의미로 판정해 장례를 치렀던 형이상학이, 가장 정밀한 논리적 도구를 쥔 철학자들의 손에서 되살아난 것이죠. 콰인은 "존재한다는 것은 변항의 값이 되는 것"이라는 기준으로 존재론을 과학 이론 선택의 문제로 복권시켰고, 크립키의 가능세계 의미론과 본질주의는 필연, 본질, 동일성을 다시 일급 주제로 만들었습니다. 이후 루이스(David Lewis)의 양상 실재론, 킷 파인의 본질 이론 등 현대 분석 형이상학이 만개합니다. 언어 분석으로 형이상학을 제거하려던 운동이, 언어 분석을 통해 형이상학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물론 콰인 자신은 크립키식 본질주의를 끝까지 의심했고, 이 긴장은 현재진행형입니다. 한편 같은 시기 유럽 대륙에서는 의식의 구조를 직접 기술하려는 전혀 다른 기획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다음 과목에서 만날 후설의 현상학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콰인의 전체론(어떤 문장이든 개정 가능)과 크립키의 필연적 후험(어떤 진리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참)은 양립할 수 있을까요? 개정 가능성과 필연성은 같은 층위의 개념일까요?
- 여러분의 이름이 여러분을 가리키는 이유는 여러분에 대한 기술들 때문일까요, 명명에서 이어진 인과 사슬 때문일까요? 자신이 모든 기술을 배반하며 변해 온 경우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이전: 5강 후기 비트겐슈타인 · 다음: 현상학 1강 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