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항해와 근대의 문 2강. 95개조가 쪼갠 유럽
한 수도사의 항의문이 유럽을 쪼갠 것이 아닙니다. 항의문을 몇 주 만에 대륙 전체에 뿌린 인쇄기가 유럽을 쪼갰습니다.
풀고 시작
면벌부와 한 교수의 항의
1517년, 로마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새로 짓느라 돈이 필요했습니다. 자금줄 하나가 면벌부(indulgence) 판매였죠. 설교자 테첼은 "동전이 궤에 짤랑 떨어지는 순간 영혼이 연옥에서 튀어나온다"는 식의 선전으로 악명을 얻었습니다. 이를 지켜보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1483~1546)는 그해 10월 31일, 면벌부의 효력을 따지는 95개조 논제를 내놓습니다. 대학 게시판에 라틴어 토론 주제를 거는 일은 당시로선 평범한 학술 절차였습니다. 그런데 이 문서가 독일어로 번역되고 인쇄되면서 일이 커집니다.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이, 몇 달 만에 유럽이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황제 앞에 선 루터는 철회를 거부했고, 파문과 제국 추방령을 받았습니다. 작센 선제후의 보호 아래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은 그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합니다. 성직자를 거치지 않고 누구나 성서를 직접 읽게 하겠다는 것, 이것이 개혁의 심장이었습니다.
칼뱅과 프로테스탄트의 확산
개혁의 2세대는 프랑스 출신 법학도 장 칼뱅(1509~1564)이었습니다. 1536년 『기독교 강요』를 펴낸 그는 제네바에서 신앙과 도시 생활 전체를 재조직했습니다. 칼뱅 신학의 유명한 축이 예정설입니다. 구원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신의 주권적 선택에 달려 있다는 교리죠. 언뜻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 것 같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선택받았음을 삶으로 증명하려는 강한 규율의 에너지를 낳았습니다. 칼뱅주의는 국경을 넘는 네트워크로 퍼져 프랑스의 위그노, 네덜란드의 개혁교회, 스코틀랜드의 장로교로 뿌리내렸습니다. 훗날 베버가 이 규율과 자본주의 정신을 연결하는 유명한 가설을 내놓지만, 이는 통설이라기보다 지금도 논쟁 중인 명제입니다.
로마의 반격, 가톨릭 개혁
가톨릭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스스로를 수술했죠.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교리를 명확히 다듬고 성직자 교육과 규율을 뜯어고쳤습니다. 1540년 승인된 예수회는 교육과 선교의 정예 조직으로, 유럽 각지에 학교를 세우고 아시아와 아메리카까지 나아갔습니다. 마테오 리치가 명나라 궁정에서 활동한 것도 이 흐름입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시기를 일방적 "반동 종교개혁"보다 가톨릭 개혁이라 부르는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유럽에는 하나의 교회 대신 서로를 이단으로 여기는 여러 교회가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30년 전쟁과 베스트팔렌
공존은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통치자의 종교가 그 지역의 종교"라는 원칙으로 루터파와 가톨릭의 휴전을 만들었지만, 칼뱅파는 아예 계산에서 빠져 있었고 불씨는 그대로 남았습니다. 결국 1618년 프라하에서 개신교 귀족들이 황제의 관리들을 창밖으로 던져 버린 사건을 도화선으로 30년 전쟁(1618~1648)이 터집니다. 종교 전쟁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왕조들의 세력 다툼으로 변질되었고, 가톨릭 프랑스가 개신교 편에 서서 참전할 정도였습니다. 전장이 된 독일 지역은 인구의 상당 부분을 잃는 참화를 겪었습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이 지옥을 끝내며 새 원칙을 굳혔습니다. 각 통치자가 자기 영토의 종교를 정하고, 외부 세력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황과 황제라는 보편 권위 위에 있던 유럽이, 대등한 주권국가들의 체제로 재편되는 출발점이죠. 오늘날 국제 질서를 "베스트팔렌 체제"라 부르는 이유입니다. 다만 이 조약 하나가 근대 주권을 단번에 발명했다는 서사는 후대의 단순화라는 지적도 있다는 점은 기억해 둘 만합니다. 이렇게 유럽이 안에서 쪼개지는 동안, 밖으로는 대양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다음 강의 주제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인쇄술이 없었다면 루터도 후스처럼 잊혔을까요. 매체 기술이 사상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주장은 어디까지 타당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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