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세계대전 2강. 사라예보의 총성, 4년의 참호
한 청년의 권총 두 발이 어떻게 900만 병사의 목숨을 삼키는 전쟁이 됐을까요. 유럽은 알면서 걸어 들어갔을까요, 잠결에 굴러떨어졌을까요.
풀고 시작
화약고와 두 발의 총성
1914년 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열아홉 살 세르비아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를 권총으로 쏘았습니다. 한 발의 암살이 세계대전이 된 것은 유럽이 이미 두 진영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중심의 동맹과 프랑스, 러시아, 영국의 협상이 마주 섰고, 발칸은 민족주의와 열강의 이해가 얽힌 화약고였습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최후통첩을 보내자 러시아가 세르비아 뒤에, 독일이 오스트리아 뒤에 섰고, 동원령이 동원령을 부르며 7월 위기는 한 달 만에 전면전이 됩니다. 책임 논쟁은 지금도 뜨겁습니다. 1961년 독일 역사가 프리츠 피셔는 독일 지도부가 패권을 위해 전쟁을 의도했다고 주장해 자국 학계를 뒤흔들었고, 2012년 크리스토퍼 클라크는 『몽유병자들』에서 모든 열강이 눈뜬 채 파국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상호작용의 그림을 내놓았습니다. 단독 범인론과 집단 몽유병론 사이의 이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전에 끝난다던 전쟁
개전 당시 병사들은 크리스마스 전에 집에 돌아간다고 믿었습니다. 독일은 프랑스를 몇 주 안에 꺾고 러시아로 도는 속전속결 계획(슐리펜 계획)에 걸었지만, 1914년 9월 마른 전투에서 진격이 멈추면서 계획은 무너집니다. 양군은 땅을 파고 들어갔고, 스위스 국경에서 북해까지 참호선이 이어졌습니다. 기관총과 철조망, 대포가 지키는 참호를 향해 보병이 돌격하는 전쟁, 방어가 공격을 압도하는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1916년이 그 지옥의 절정이었습니다. 베르됭에서 프랑스와 독일이 열 달을 갈아 넣었고, 솜 전투 첫날 하루에만 영국군 약 5만 7천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얻은 땅은 몇 킬로미터 단위였습니다. 1914년 첫 크리스마스에 일부 전선에서 양군 병사들이 참호를 나와 함께 캐럴을 부르고 축구를 했다는 비공식 휴전의 일화는, 이 전쟁이 증오보다 구조에 의해 굴러갔음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전쟁은 전선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가 경제 전체가 전쟁 기계로 재편되는 총력전(total war)이 처음 등장했고, 공장으로 나간 여성들의 노동은 전후 여성 참정권 확대의 강력한 근거가 됩니다.
러시아가 무너지고 미국이 들어오다
전쟁의 무게를 가장 먼저 못 버틴 것은 러시아였습니다. 1917년 2월(러시아 구력) 페트로그라드의 빵 시위가 혁명이 되어 300년 로마노프 왕조가 무너졌고, 같은 해 10월 레닌의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정권은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막대한 영토를 내주며 전쟁에서 빠져나갑니다. 독일에게는 동부전선이 닫힌 대신 서쪽에서 새 적이 열렸습니다.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에 밀려 1917년 4월 미국이 참전한 것입니다. 독일은 1918년 봄 마지막 대공세를 퍼부었지만 미군이 쏟아져 들어오면서 힘이 꺾였고, 후방의 혁명 속에 황제가 퇴위한 뒤 1918년 11월 11일 휴전이 발효됩니다. 전사자 약 900만, 유럽 한 세대가 갈려 나간 뒤였습니다.
평화 조약에 심긴 씨앗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군비 제한과 영토 상실, 그리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웠습니다. 특히 231조는 전쟁의 책임을 독일과 그 동맹에 지우는 근거가 됐고, 독일인들은 이를 "전쟁 책임 조항"이라 부르며 굴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회의에 참석했던 젊은 경제학자 케인스는 『평화의 경제적 귀결』에서 이 조약이 유럽 경제를 망가뜨리고 복수심을 키울 것이라 경고하고 자리를 박찼습니다. 조약이 실제로 나치를 낳았는가에 대해서는 학계의 평가가 갈리지만, 굴욕의 기억이 훗날 선동의 재료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그 이야기는 3강에서 이어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억지를 위해 만든 동맹이 오히려 전쟁을 키웠습니다. 오늘날의 군사 동맹은 이 함정을 무엇으로 피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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