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 2강. 대표 없이 과세 없다
미국 혁명의 도화선은 거창한 이념이 아니라 세금 고지서였습니다. 그런데 그 고지서가 근대 최초의 공화국을 만들어냅니다.
풀고 시작
승전국의 청구서
1763년 영국은 7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꺾고 북아메리카의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승리의 뒷면에는 천문학적인 전쟁 빚이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의 계산은 단순했습니다. 식민지를 지키느라 쓴 돈이니 식민지도 분담하라는 것이죠. 1765년 인지세법(Stamp Act)이 대표적입니다. 신문, 계약서, 심지어 트럼프 카드에까지 인지를 붙여 세금을 걷겠다는 법이었습니다. 식민지의 반발은 예상을 뛰어넘었습니다. 문제는 액수가 아니라 원리였습니다. 식민지인들은 자신들의 대표가 없는 영국 의회가 세금을 매길 권리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갈등은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으로 치닫습니다. 식민지인들이 항구에 정박한 배에 올라 동인도회사의 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린 것이죠. 영국이 보스턴 항구 봉쇄로 응수하자 화해의 길은 사실상 닫혔습니다.
1776년, 독립을 논증하다
1776년 7월 4일 채택된 독립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은 단순한 결별 통보가 아니라 한 편의 철학 논문이었습니다. 초안을 쓴 제퍼슨은 로크의 사회계약론을 뼈대로 삼았습니다. 모든 사람은 생명, 자유, 행복 추구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지니고 태어났으며, 정부는 이 권리를 지키기 위해 피지배자의 동의로 세워진다는 것. 그리고 결정적 한 문장이 이어집니다. 정부가 이 목적을 파괴하면 인민은 그 정부를 갈아치울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강에서 본 명예혁명의 논리가 이제 왕권 제한을 넘어 독립의 근거로 확장된 셈이죠. 전쟁 자체는 쉽지 않았습니다. 워싱턴이 이끄는 대륙군은 세계 최강의 영국군을 상대로 자주 패했고, 밸리 포지의 겨울처럼 군대가 굶주림과 추위로 무너질 뻔한 고비도 있었죠. 전세를 기울인 것은 외교였습니다. 7년 전쟁의 복수를 노리던 프랑스가 식민지 편에 참전한 것입니다. 1781년 요크타운에서 미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냈고, 1783년 영국은 미국의 독립을 인정합니다.
헌법이라는 두 번째 혁명
독립 후 미국은 곧 두 번째 문제에 부딪힙니다. 13개 주를 느슨하게 묶은 연합 체제는 세금도 제대로 못 걷는 무력한 정부였습니다.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인 대표들은 아예 새 판을 짰습니다. 성문 헌법으로 연방정부를 세우되, 권력이 폭주하지 못하게 이중 장치를 걸었습니다. 하나는 연방주의(federalism)입니다. 권력을 연방과 주로 나눠 어느 쪽도 전부를 갖지 못하게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삼권분립과 견제와 균형입니다. 의회, 대통령, 법원이 서로를 견제하게 만든 것이죠. 왕을 몰아낸 크롬웰이 스스로 절대 권력이 됐던 영국의 실패를 기억한다면, 이 설계의 의도가 보입니다. 문제는 폭군 개인이 아니라 견제받지 않는 권력 그 자체라는 통찰입니다.
혁명이 비켜간 사람들
여기서 정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선언한 나라는 노예제 위에 서 있었습니다. 제퍼슨 자신이 수백 명의 노예를 소유했고, 헌법은 노예 수의 5분의 3을 인구에 산입하는 타협 조항으로 노예제를 사실상 승인했습니다. 원주민에게 혁명은 해방이 아니라 재앙의 서막이었습니다. 독립 이후 서부 팽창은 원주민의 땅을 빼앗는 과정이기도 했으니까요. 여성에게도 참정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미국 혁명을 미완의 혁명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다만 이런 평가도 있습니다. 혁명이 내건 평등의 언어는 일단 세상에 나오자 주인을 가리지 않았고, 훗날 노예제 폐지론자들과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바로 그 독립선언을 무기로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혁명의 소식은 대서양을 건너 프랑스에 불을 붙입니다. 다음 강의 주제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노예 소유주가 쓴 평등 선언은 위선일까요, 아니면 저자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기가 된 문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