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 3강. 1789: 구체제의 붕괴
자유와 평등을 내건 혁명이 4년 만에 단두대 공포정치로 치달았습니다. 혁명은 왜 자기 자식을 잡아먹었을까요.
풀고 시작
파산한 왕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혁명의 방아쇠는 돈이었습니다. 루이 16세의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을 지원하느라 재정이 파산 직전이었고, 세금을 더 걷으려면 성직자(제1신분)와 귀족(제2신분)의 면세 특권을 건드려야 했습니다. 귀족들이 저항하자 왕은 1789년 5월, 175년 만에 삼부회를 소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체제(Ancien Régime)의 모순이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인구의 압도적 다수인 제3신분(평민)이 낸 대표가 절반을 차지했지만, 신분별로 한 표씩 던지는 방식이면 늘 2대 1로 지는 구조였던 것이죠. 제3신분 대표들은 아예 판을 엎고 스스로를 국민의회로 선언했고, 회의장이 폐쇄되자 테니스 코트에 모여 헌법 제정 전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왕이 군대를 모은다는 소문이 돌자 1789년 7월 14일 파리 민중이 바스티유 요새를 습격했습니다. 갇힌 죄수는 일곱 명뿐이었지만, 왕의 감옥이 무너지는 장면의 상징성은 계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같은 해 8월, 국민의회는 봉건적 특권 폐지를 선언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인권선언)을 채택합니다.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한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법은 일반 의지의 표현이라는 내용이었죠. 미국 독립선언이 한 나라의 독립 논거였다면, 인권선언은 처음부터 인류 보편을 향해 쓰인 문서였습니다. 물론 한계도 뚜렷했습니다. 여기서 시민은 사실상 남성이었고,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써서 항의하다 훗날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혁명은 초기에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1791년 루이 16세 일가가 변장하고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국경 근처 바렌에서 붙잡히는 사건이 터집니다. 왕이 혁명을 버리고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왕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고, 여기에 혁명의 확산을 두려워한 주변 왕정 국가들과의 전쟁까지 겹치며 혁명은 급진화됩니다. 1792년 공화정이 선포됐고,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자신의 백성이 세운 단두대에서 처형됩니다.
공포정치, 혁명의 자기잠식
1793년부터 1794년까지, 혁명은 가장 어두운 국면으로 들어갑니다. 외국 군대의 침공, 내부 반란, 경제 위기가 겹치자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안위원회는 비상 통치를 선언했습니다. 혁명의 적으로 지목되면 약식 재판을 거쳐 단두대로 보내졌고, 이 시기 처형된 사람이 1만 명을 훌쩍 넘습니다. 섬뜩한 것은 로베스피에르가 부패한 폭군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청렴결백한 자라 불린 그는 덕의 공화국이라는 이상을 진심으로 믿었고, 바로 그 이상 때문에 반대자를 덕의 적으로 규정할 수 있었습니다. 혁명 동지였던 당통마저 단두대로 보낸 끝에, 1794년 7월(혁명력 테르미도르) 로베스피에르 자신이 체포되어 다음 날 처형됩니다. 혁명이 혁명가를 잡아먹는 이 자기잠식의 구조는 이후 여러 혁명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됩니다.
나폴레옹, 혁명의 상속자이자 배신자
혼란에 지친 프랑스에서 179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인물이 나폴레옹입니다. 그는 1804년 스스로 황제가 되어 공화정을 끝냈지만, 같은 해 공포한 나폴레옹 법전(민법전)에 법 앞의 평등, 재산권, 봉건 특권 폐지 같은 혁명의 원칙을 새겨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복 전쟁은 의도치 않은 효과를 낳습니다. 프랑스군이 지나간 자리마다 구체제가 흔들렸고, 동시에 점령에 맞서는 저항 속에서 민족주의가 자라난 것이죠. 혁명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부르주아 계급혁명으로 보는 고전적(마르크스주의적) 해석과, 그 도식을 비판하며 정치 문화의 변동을 강조하는 수정주의 해석이 맞서 왔고, 공포정치를 혁명의 일탈로 볼지 내재적 논리로 볼지도 갈립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입니다. 1789년 이후 유럽의 어떤 왕좌도 다시는 편안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공포정치는 전쟁과 위기가 낳은 일탈일까요, 아니면 덕의 공화국이라는 이상 자체에 내장된 논리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