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주의와 세계대전 4강. 인류 최대의 전쟁
2차 세계대전의 사망자는 5천만 명을 훌쩍 넘습니다. 그중 절반 이상이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습니다. 전쟁의 성격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풀고 시작
두 개의 시작점
유럽에서 전쟁은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됐습니다. 그 여드레 전, 세계는 뒤통수를 맞았습니다. 철천지원수로 알려진 히틀러와 스탈린이 불가침 조약을 맺고 비밀리에 폴란드를 나눠 갖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시아의 시각에서 보면 전쟁은 이미 진행 중이었습니다. 일본은 1931년 만주를 점령했고 1937년부터 중국과 전면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를 전쟁의 시작으로 볼 것인가 자체가 관점의 문제입니다. 개전 초 독일은 전차와 항공기를 묶은 전격전으로 폴란드에 이어 1940년 프랑스까지 6주 만에 무너뜨렸습니다. 1차 대전에서 4년을 버틴 프랑스의 붕괴는 세계를 경악시켰습니다. 홀로 남은 영국은 처칠의 지휘 아래 항공전을 버텨 냈고, 히틀러는 1941년 6월 22일 조약을 찢고 소련을 침공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7일 일본이 진주만의 미국 함대를 기습하면서, 두 개의 전쟁은 하나의 세계대전으로 합쳐졌습니다.
전환점: 스탈린그라드와 미드웨이
1942년까지 추축국은 이기고 있었습니다. 흐름이 꺾인 지점을 꼽으라면 역사가들은 대개 두 곳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입니다. 1942년 여름부터 이듬해 2월까지 시가지의 폐허 하나하나를 두고 벌어진 이 소모전에서 독일 제6군 전체가 포위되어 항복했습니다. 이후 독일은 동부전선에서 다시는 전략적 주도권을 잡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태평양의 미드웨이입니다. 1942년 6월, 암호 해독으로 일본의 기습 계획을 미리 읽은 미군은 단 몇 분의 공격으로 일본 항공모함 4척을 격침했습니다. 진주만 이후 반년 만에 태평양의 균형이 뒤집힌 것입니다. 이후는 생산력의 전쟁이었습니다. 미국의 공장은 상상을 넘는 속도로 함선과 항공기를 찍어 냈고, 소련은 우랄 산맥 너머로 통째로 옮긴 공장에서 전차를 쏟아 냈습니다. 남성들이 전선으로 떠난 자리를 여성 노동자들이 채웠고, 미국의 선전 포스터 속 "리벳공 로지"는 그 시대의 상징이 됐습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으로 서부에 제2전선이 열렸고, 독일은 1945년 5월 항복합니다.
원자폭탄과 종전
유럽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일본은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미국이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그 사이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며 만주로 진격했습니다.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합니다. 두 도시에서 그해 말까지 각각 수만에서 십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원폭 투하를 둘러싼 논쟁은 지금도 계속됩니다. 본토 상륙전의 막대한 희생을 피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견해와, 일본이 이미 붕괴 직전이었고 소련 참전이 결정적이었으며 폭탄에는 전후 소련을 겨냥한 시위의 성격도 있었다는 견해가 맞섭니다. 확실한 것은 인류가 이제 도시 하나를 한순간에 지울 무기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이 바꾼 세계 질서
이 전쟁의 사망자는 추정치에 따라 5천만에서 8천만에 이르며, 최대 피해국은 소련(약 2천만 이상)과 중국이었습니다. 국제연맹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1945년 승전국들은 국제연합(UN)을 창설했고, 안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이사국에 거부권을 주는 현실주의적 설계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승전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얄타와 포츠담에서 이미 금이 가던 미국과 소련의 관계는 유럽의 분할 점령선을 따라 굳어졌고, 세계는 두 초강대국의 진영으로 재편되기 시작합니다. 유럽 열강의 시대는 끝났고, 식민지들의 독립 요구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습니다. 냉전이라 불리게 될 이 새 질서는 다음 과목에서 다룹니다. 그 전에, 이 전쟁이 남긴 가장 무거운 유산을 5강에서 마주해야 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전쟁을 끝내기 위한 폭력에는 한계가 있어야 할까요. 있다면 그 선은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긋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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