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1강. 로마 이후: 프랑크와 봉건제
로마가 무너진 자리에 나타난 것은 야만의 공백이 아니라, 유럽이라는 새로운 질서의 설계도였습니다.
풀고 시작
제국이 사라진 아침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의 어린 황제를 폐위시켰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 대부분은 이 날을 "로마 멸망의 날"로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황제 자리가 빈 것은 처음이 아니었고, 동쪽 콘스탄티노폴리스에는 여전히 로마 황제가 건재했으니까요. 변화는 폭발이 아니라 침식이었습니다. 376년 훈족에게 밀린 고트족이 도나우강을 건넌 이래, 게르만 여러 부족은 약 한 세기에 걸쳐 제국 안으로 이동해 들어왔고, 서로마의 행정과 군대는 서서히 그들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무너진 것은 하루아침의 성벽이 아니라, 세금을 걷고 도로를 관리하고 군단을 유지하던 거대한 시스템이었습니다.
프랑크의 승부수: 개종
수많은 게르만 왕국 중 왜 하필 프랑크가 살아남았을까요. 결정적 한 수는 종교였습니다. 다른 게르만 왕국 다수가 로마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아리우스파를 믿은 반면, 프랑크의 왕 클로비스는 496년 무렵(정확한 연대는 논쟁이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했습니다. 갈리아의 주교들과 로마계 주민들이 프랑크를 "우리 편"으로 받아들일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후 카롤루스 마르텔이 732년 투르. 푸아티에 사이의 전투에서 이슬람 세력의 북진을 저지했고, 그의 손자 카롤루스 대제(재위 768~814)는 서유럽 대부분을 아우르는 제국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800년 크리스마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에서 교황 레오 3세가 그의 머리에 관을 씌웁니다. 게르만의 왕이 교회의 손을 거쳐 로마 황제가 된 순간, 왕권과 교회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중세 특유의 동맹이 공식화되었습니다. 다만 이 동맹은 훗날 "관을 씌운 자가 위인가, 쓴 자가 위인가"라는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그 폭발은 2강에서 다룹니다.
봉건제: 국가 없이 질서 만들기
카롤루스의 제국은 그의 사후 분열했고, 9~10세기에는 바이킹과 마자르의 침입이 이어졌습니다. 중앙정부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유럽의 답이 봉건제(feudalism)였습니다. 작동 원리는 계약입니다. 주군은 봉신에게 봉토(토지)를 주어 생계와 군비를 보장하고, 봉신은 주군에게 기사로서의 군사 봉사와 조언을 바칩니다. 쌍방이 의무를 지는 관계라서, 주군이 의무를 어기면 봉신이 복종을 거둘 명분도 생겼습니다. 훗날 왕도 계약을 지켜야 한다는 유럽 정치사상의 감각은 이 쌍무성에서 자라났다고 평가됩니다. 한편 경제의 밑바닥에는 장원(manor)이 있었습니다. 영주의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로 이루어진 자급자족 단위로, 농노는 노예와 달리 가족과 보유지를 가졌지만 장원을 떠날 자유가 없었고, 부역과 각종 공납의 의무를 졌습니다. 정치는 주종관계로, 경제는 장원으로 돌아가는 이중 구조가 중세 유럽의 골격이었습니다.
"암흑시대"라는 낙인 다시 보기
중세를 "암흑시대"라 부른 것은 14세기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는 후대의 낙인입니다. 고대의 빛과 자기 시대의 부활 사이에 어둠을 끼워 넣은 것이죠. 그러나 현대 역사가들은 이 표현을 거의 쓰지 않습니다. 카롤루스 궁정은 고전 문헌을 필사하고 읽기 쉬운 서체를 정비했는데(카롤링거 소문자체), 오늘날 남은 라틴 고전 상당수가 이 시기 수도원 필사본 덕에 전해집니다. 물론 도시와 교역, 문자 문화가 로마 전성기보다 위축된 것은 사실입니다. 요컨대 쟁점은 "어두웠는가"가 아니라, 위축과 재편 속에서 무엇이 새로 만들어졌는가입니다. 앞선 실크로드가 보여준 유라시아 교역망의 서쪽 끝이 다시 활기를 찾는 이야기는 3강에서 이어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중앙정부가 치안을 보장하지 못할 때 사적 계약(주종관계)으로 질서를 만드는 방식은 오늘날 어떤 형태로 다시 나타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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