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유럽 2강. 교회의 시대와 십자군
성지를 되찾겠다며 떠난 군대가 끝내 약탈한 것은 같은 크리스트교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였습니다.
풀고 시작
왕관 위의 십자가
1강에서 예고한 질문이 여기서 터집니다. 관을 씌운 교황과 관을 쓴 황제, 누가 위일까요. 도화선은 주교 서임권(투자권)이었습니다. 중세의 주교는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지와 병력을 가진 제후였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주교 임명을 통치의 도구로 써 왔습니다. 개혁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가 1075년 세속 군주의 주교 서임을 금지하자, 젊은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교황 폐위를 선언했고, 교황은 황제를 파문으로 받아쳤습니다. 파문은 치명적이었습니다. 봉신들의 충성 의무가 풀리면서 제후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입니다. 궁지에 몰린 황제는 1077년 겨울, 이탈리아 카노사 성 앞에서 참회자의 옷차림으로 사흘을 서서 사면을 받아냅니다. 다만 이 굴욕은 끝이 아니라 휴전이었습니다. 하인리히는 세력을 회복해 로마로 쳐들어갔고, 서임권 투쟁은 1122년 보름스 협약의 타협으로야 일단락됩니다. 그래도 "황제조차 교황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다"는 장면의 상징 효과는 컸고, 교황권은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프랑스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폭탄선언을 합니다. 셀주크 튀르크에게 밀리던 비잔티움 황제의 구원 요청을 받아,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무장 순례를 호소한 것입니다. 군중은 "신께서 그것을 원하신다"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반응은 교황의 예상을 넘었습니다. 기사만이 아니라 농민 수만 명까지 길을 나섰고, 일부 무리는 출발지 인근 라인란트의 유대인 공동체를 학살하는 것으로 "원정"을 시작했습니다. 십자군의 어두운 얼굴은 처음부터 함께 있었던 셈입니다. 1차 십자군은 1099년 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이때 벌어진 대량 학살은 크리스트교 측 기록조차 숨기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후 성지에 세워진 십자군 국가들은 1187년 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을 다시 내주었고, 원정은 2백 년 가까이 단속적으로 이어졌지만, 1291년 최후 거점 아크레가 함락되면서 성지의 영구 확보라는 목표는 끝내 실패로 마감됩니다.
방향을 잃은 십자가: 1204년
십자군의 민낯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은 4차 십자군입니다. 이집트로 가기로 한 원정군은 베네치아에 뱃삯을 갚지 못하자 베네치아의 요구대로 크리스트교 도시 자라를 공격했고, 비잔티움의 제위 다툼에 끼어든 끝에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사흘간 약탈했습니다. 천 년 제국의 수도에 쌓인 성유물과 보물이 서유럽으로 실려 나갔고(베네치아 산마르코 성당의 청동 말이 그 전리품입니다), 같은 하나님을 믿는 도시가 이슬람이 아닌 십자군의 손에 무너진 것입니다. 비잔티움은 이후 영토를 일부 회복했지만 이 타격에서 끝내 온전히 회복하지 못했고, 동서 교회의 감정의 골은 돌이킬 수 없이 깊어졌습니다.
십자군이 남긴 것
그렇다면 이 실패한 원정은 무엇을 바꿨을까요. 유럽 쪽에서는 지중해 교역이 크게 자극되어 베네치아와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가 번영했고, 이 상업 부활은 3강에서 볼 도시와 대학의 토양이 됩니다. 동방과의 접촉은 유럽인의 시야를 넓혔습니다. 반면 이슬람 세계 쪽 시각은 우리 통념과 다릅니다. 당대 이슬람 세계에게 십자군은 세계사적 대결이라기보다 변방의 소란에 가까웠고, 그들에게 훨씬 큰 재앙은 곧 닥칠 몽골의 침입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연구자들의 대체적 평가입니다. 십자군을 "문명 충돌"의 원형으로 읽는 익숙한 서사는 상당 부분 근대에 소급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슬람 문명 자체의 이야기는 이슬람 세계 과목에서 정면으로 다룹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종교적 이상으로 시작한 운동이 경제적 이해관계에 끌려가는 패턴은 십자군 이후의 역사에서 어떤 사례로 반복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