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3강. 몽골: 역사상 가장 넓은 제국
문자도 도시도 없던 초원의 부족이 두 세대 만에 유라시아를 하나의 교역망으로 묶었습니다. 그 길로 상인과 사상과 병원균이 함께 달렸습니다.
풀고 시작
버려진 소년, 유라시아의 지배자가 되다
테무진의 출발은 제국과 가장 먼 곳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독살당한 뒤 부족에게 버림받아 어머니와 함께 초원에서 풀뿌리를 캐며 살아남았다고 몽골의 역사서 몽골비사는 전합니다. 그 소년이 부족들을 하나씩 복속시켜 1206년 쿠릴타이(부족장 회의)에서 칭기즈 칸으로 추대됩니다. 이후 정복의 속도는 전례가 없었습니다. 금나라를 공격해 화북을 흔들었고, 사절단을 살해한 중앙아시아의 호라즘 제국을 몇 년 만에 지도에서 지웠습니다. 비결은 신비가 아닙니다. 부족 단위를 해체해 십호, 백호, 천호로 재편한 군사 조직, 전원이 기병인 군대의 기동력, 항복하면 살리고 저항하면 본보기로 삼는 계산된 공포, 그리고 정복지의 기술자(공성 기술자, 행정가)를 즉시 흡수하는 실용주의였습니다. 손자들 대에 이르면 제국은 고려에서 동유럽까지,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연속 육상 제국이 됩니다. 1258년 훌라구는 바그다드를 함락해 500년 아바스 칼리프조를 끝냈습니다. 이슬람 세계 강의에서 본 그 바그다드입니다.
팍스 몽골리카: 초원에 깔린 고속도로
정복이 끝난 자리에 뜻밖의 것이 왔습니다. 평화, 정확히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 불리는 교역의 안전입니다. 제국은 간선로에 일정 간격으로 역참(잠)을 두어 공무 여행자에게 말과 숙식을 제공했고, 통행증을 지닌 상인은 제국 어디든 다닐 수 있었습니다. 몽골 지배층은 종교에 관용적이어서 불교 승려, 이슬람 상인, 기독교 선교사가 같은 길을 오갔습니다.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인쇄술과 화약이 서쪽으로, 이슬람의 천문학과 의학이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실크로드가 처음 열린 것은 한나라 때지만, 전 구간이 단일 권력 아래 놓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두 여행자의 증언
이 시대의 스케일은 두 여행자의 기록으로 실감할 수 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 마르코 폴로는 1271년 무렵 출발해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에서 오래 머물다 20년도 더 지나 귀향했고, 그의 구술을 담은 동방견문록은 유럽인의 아시아 상상을 바꿔 놓았습니다. 훗날 콜럼버스가 이 책의 애독자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과장이 많다는 비판과 여행 자체를 의심하는 회의론도 있지만, 원대 중국의 실상과 부합하는 세부가 많아 학계 다수는 여행 자체는 사실로 봅니다. 한 세대 뒤 모로코의 법학자 이븐 바투타는 약 30년간 이슬람 세계와 인도, 중국까지 다녀왔다고 기록했습니다. 유럽인과 아프리카 출신 무슬림이 같은 세기에 중국을 오갈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팍스 몽골리카의 증거입니다.
길은 병도 실어 날랐다
연결에는 청구서가 따랐습니다. 14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에서 퍼지기 시작한 페스트, 즉 흑사병은 몽골이 깔아 놓은 바로 그 교역로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1347년 크림반도의 항구 카파에서 제노바 상선을 통해 지중해로 번졌고, 몇 년 만에 유럽 인구의 3분의 1 안팎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카파를 포위한 몽골군이 병사한 시신을 성 안으로 던졌다는 이야기가 당대 기록에 전하지만, 실제 전파 경로로는 쥐와 벼룩을 실은 배가 더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제국 자체도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네 개의 한국(칸국)으로 나뉜 제국은 계승 분쟁과 역병 속에 흔들렸고, 중국의 원은 1368년 명에 밀려 초원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몽골에 대한 평가는 둘로 갈립니다. 도시를 지우고 학살한 파괴자인가, 유라시아를 처음으로 하나의 회로에 연결한 연결자인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가 아니라, 같은 제국의 두 얼굴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시각에 가깝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파괴자와 연결자라는 몽골의 두 얼굴 중 어느 쪽에 더 무게를 둘지는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바그다드에서 본 몽골과 베네치아에서 본 몽골은 같은 제국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