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고대 제국 3강. 페르시아: 관용으로 다스린 제국
우리가 아는 페르시아는 대부분 적이 쓴 기록입니다. 그 기록을 걷어내면 전혀 다른 제국이 나타납니다.
풀고 시작
정복자가 해방자로 불린 이유
기원전 539년, 키루스 2세의 군대가 바빌론에 입성합니다. 그런데 뜻밖의 장면이 펼쳐집니다. 대규모 파괴도 학살 기록도 없이, 키루스는 바빌론의 주신 마르두크의 이름으로 자신의 통치를 선포합니다. 정복당한 도시의 신을 자기 명분으로 삼은 것이죠. 그는 바빌론에 끌려와 있던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용했고, 그래서 구약성경은 이방인 왕 키루스를 놀랍도록 호의적으로 기록합니다. 1879년 바빌론 터에서 발견된 점토 원통, 키루스 실린더에는 이 관용 정책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를 최초의 인권선언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학계는 신중합니다. 정복지의 관습을 존중한다는 선언은 메소포타미아 왕들의 오랜 즉위 수사이기도 했고, 인권이라는 현대 개념을 고대에 소급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입니다. 그래도 강요된 동화 대신 다양성 위의 통치를 택했다는 사실 자체는 남습니다.
다리우스의 제국 경영
키루스가 제국을 넓혔다면, 다리우스 1세(재위 기원전 522~486)는 제국을 시스템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는 광대한 영토를 20여 개의 속주로 나누고 사트라프라 불리는 총독을 파견했습니다. 총독의 반란을 막기 위해 군 지휘관과 감찰관을 따로 두고, 왕의 눈과 귀라 불린 감찰관들이 순회하게 했습니다. 서쪽 사르디스에서 수도 수사까지 약 2,700km를 잇는 왕의 길에는 역참이 놓여, 파발이 릴레이로 달리면 일주일 남짓에 주파했다고 헤로도토스가 전합니다. 표준 금화 다릭, 공용어로 쓰인 아람어까지, 다양한 민족을 하나의 행정망으로 묶는 장치들이었습니다. 다리우스는 자신의 즉위 과정을 베히스툰의 절벽에 세 가지 언어의 쐐기문자로 새기게 했는데, 이 비문은 19세기에 헨리 롤린슨 등이 쐐기문자를 해독하는 결정적 열쇠가 됩니다. 제국의 선전물이 2천 년 뒤 고대 근동사 전체를 여는 암호표가 된 셈이죠. 1강의 진한 제국이 표준화로 통일을 완성했다면, 페르시아는 다양성을 유지한 채 연결망으로 묶은 셈입니다.
조로아스터교: 선과 악의 우주
페르시아인의 종교는 예언자 자라수슈트라(그리스식으로 조로아스터)에게서 비롯한 조로아스터교였습니다. 세계를 지혜의 신 아후라 마즈다와 악의 세력이 싸우는 무대로 보고, 인간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선의 편에 서야 하며, 마지막에는 심판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최후 심판, 천국과 지옥, 구원자 같은 관념이 포로기 이후 유대교, 나아가 기독교에 영향을 줬다는 논의가 학계에서 진지하게 이뤄지고 있습니다. 영향의 정도를 두고는 견해가 갈리지만요. 중요한 것은 페르시아 왕들이 이 신앙을 믿으면서도 타민족에게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리우스의 비문들은 아후라 마즈다의 이름으로 통치를 정당화하지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의 격식을, 바빌론에서는 그 지역의 격식을 따르는 유연함을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의 신앙과 여러 얼굴의 통치가 공존한 것입니다.
적이 쓴 역사 뒤집어 읽기
우리가 페르시아를 전제와 사치의 제국으로 떠올린다면, 그 이미지의 출처는 대부분 그리스입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도, 페르시아 전쟁을 다룬 그리스 비극도 결국 적국의 기록이니까요. 20세기 후반부터 학자들은 페르세폴리스에서 나온 행정 점토판 같은 페르시아 자체 사료로 제국을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드러난 것은 임금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들, 배급 대장, 정교한 관료제입니다. 채찍의 제국이 아니라 장부의 제국이었던 것이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말을 이 제국만큼 실감하게 하는 사례는 드뭅니다. 이 페르시아가 그리스와 정면으로 충돌한 이야기는 고전 고대 과목에서 이미 만났고, 제국의 길들이 동서 교역로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4강에서 계속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관용은 페르시아의 도덕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민족 제국을 유지하는 가장 값싼 통치 기술이었을까요? 둘의 구분이 애초에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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