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 1강. 왕의 목을 벤 의회
1649년 1월, 유럽인들은 상상도 못 한 장면을 목격합니다. 신하들이 재판을 열어 왕의 목을 벤 것입니다.
풀고 시작
왕은 누구에게도 답하지 않는다?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의 신봉자였습니다. 왕은 신에게서 권력을 받았으니 지상의 누구에게도, 특히 의회 따위에는 답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죠. 그는 1629년부터 11년간 의회를 아예 소집하지 않고 통치했고, 선박세 같은 세금을 의회 동의 없이 거둬들였습니다. 문제는 돈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종교 정책에 반발한 전쟁이 터지자 찰스는 전쟁 비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1640년 의회를 다시 불러야 했습니다. 그런데 11년간 쌓인 불만을 안고 모인 의회는 돈 대신 청구서를 내밀었습니다. 왕과 의회의 갈등은 1642년 내전으로 폭발합니다. 이것이 청교도 혁명(Puritan Revolution)이라 불리는 영국 내전의 시작입니다.
1649년 1월 30일, 처형대 위의 왕
내전은 처음부터 종교 전쟁의 성격을 함께 갖고 있었습니다. 의회파의 핵심에는 영국 국교회를 더 철저히 개혁하려던 청교도(Puritan)들이 있었고, 그래서 이 내전 전체를 청교도 혁명이라 부르는 것이죠. 그 의회군을 승리로 이끈 인물이 올리버 크롬웰입니다. 시골 젠트리 출신의 무명 의원이던 그는 신앙심으로 무장한 철기군을 조직해 왕당파를 격파했고, 포로가 된 찰스 1세는 특별법정에 세워집니다. 죄목은 반역죄였습니다. 왕이 자기 백성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이죠. 찰스는 법정의 권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왕을 재판할 수 있는 법은 지상에 없다는 것이 그의 항변이었습니다. 그러나 법정은 사형을 선고했고, 1649년 1월 30일 런던의 연회장 앞에서 왕의 목이 떨어졌습니다. 이 사건이 던진 메시지는 유럽 전체를 흔들었습니다. 왕도 법 아래에 있고, 법을 어긴 왕은 심판받을 수 있다는 선례가 생긴 것입니다.
공화정 실험, 그리고 실패
왕을 없앤 영국은 공화정을 선포합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크롬웰은 곧 의회와 충돌했고, 결국 의회를 해산한 뒤 호국경(Lord Protector)이라는 직함으로 사실상 1인 통치를 시작합니다. 왕을 몰아낸 혁명이 왕관 없는 왕을 만들어낸 셈이죠. 청교도적 통치는 극장 폐쇄 같은 금욕적 규제로 인심을 잃었고, 1658년 크롬웰이 죽자 공화정은 급속히 무너졌습니다. 1660년 영국인들은 처형된 왕의 아들 찰스 2세를 다시 불러들입니다. 왕정복고입니다. 공화정 실험의 실패는 역설적으로 중요한 교훈을 남겼습니다. 문제는 왕이라는 존재 자체가 아니라, 권력을 무엇으로 묶을 것인가였습니다.
피 없는 혁명과 권리장전
1685년 즉위한 제임스 2세가 가톨릭 복원을 밀어붙이자 의회는 더 참지 않았습니다. 1688년 의회 지도자들은 제임스의 딸 메리와 그 남편인 네덜란드 총독 윌리엄을 불러들였고, 제임스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프랑스로 도망쳤습니다. 피를 거의 흘리지 않았다 해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 부릅니다. 핵심은 그다음입니다. 1689년 의회는 왕관을 넘기는 조건으로 권리장전(Bill of Rights)을 받아냈습니다. 의회 동의 없는 법률 정지 금지, 의회 동의 없는 과세 금지, 의회 내 발언의 자유 보장. 왕은 남았지만 법 위의 왕은 사라졌습니다. 이 발명품이 입헌군주제(constitutional monarchy)입니다. 처형이라는 극약도, 왕정 폐지라는 실험도 아닌 세 번째 길이었고, 이후 의회가 재정을 틀어쥔 영국은 역설적으로 어느 절대왕정보다 효율적으로 전쟁 자금을 조달하는 강대국이 됩니다. 같은 해 로크는 통치가 피지배자의 동의에 기초한다는 논리로 이 혁명을 정당화했는데, 이 사상의 계보는 사회계약론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그리고 이 논리는 한 세기 뒤 대서양 건너에서 폭발합니다. 다음 강의 주제인 미국 혁명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공화정 실험이 실패한 영국과 달리, 왕을 처형하고도 공화정으로 나아간 나라들은 무엇이 달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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