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 전통 3강. 하나였던 교회가 갈라진 이유
1054년의 파문장 한 장이 교회를 쪼갠 것이 아닙니다. 이미 몇 세기 동안 벌어져 있던 틈에 도장이 찍혔을 뿐입니다.
풀고 시작
1054년에는 아무도 분열이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오래전부터 다른 세계를 살고 있었습니다. 서방은 라틴어로, 동방은 그리스어로 신학을 했고, 서방은 로마 주교의 수위권을 강조한 반면 동방은 다섯 총대주교좌가 대등하며 로마는 명예상 첫 자리일 뿐이라고 봤습니다. 여기에 신경의 필리오케 구절, 성상을 둘러싼 8세기의 격렬한 논쟁, 성찬에 누룩 없는 빵을 쓸지 여부 같은 문제가 층층이 쌓였죠.
1054년, 교황의 특사 훔베르트 추기경이 하기아 소피아의 제단 위에 파문장을 올려놓고 나가 버립니다. 총대주교도 맞파문으로 응수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 사건을 세계 교회의 분열로 인식하지 않았습니다. 인식이 굳어진 것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이슬람 세력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면서였습니다. 이때 생긴 감정은 신학 논쟁보다 오래갔습니다. 1965년에야 교황 바오로 6세와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가 서로의 파문을 거둡니다. 911년 만이었습니다.
95개조를 유럽으로 퍼뜨린 것은 인쇄기였습니다
1517년 비텐베르크의 신학 교수 마르틴 루터가 면벌부의 효력을 따지는 95개조 논제를 내놓습니다. 대학 게시판에 라틴어 토론 주제를 거는 일 자체는 평범한 학술 절차였죠. 그런데 이 문서가 독일어로 번역되어 인쇄되자 몇 주 만에 독일 전역이 읽고 있었습니다. 루터의 신학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라는 명제와, 권위의 최종 심급을 성서에 두는 원칙으로 요약됩니다.
같은 비판을 먼저 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위클리프가 있었고, 후스는 1415년 화형당했습니다. 루터가 살아남아 유럽을 바꾼 결정적 차이는 그의 용기보다 매체 환경이었다고 보는 연구자가 많습니다. 1521년 보름스에서 철회를 거부한 그는 바르트부르크 성에 숨어 신약을 독일어로 옮겼습니다. 성직자를 거치지 않고 누구나 성서를 읽게 하겠다는 것이 개혁의 심장이었죠. 이 시기의 정치사는 세계사 서가의 종교개혁 강에 더 자세합니다.
개혁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루터가 문을 열자 개혁은 곧바로 여러 갈래로 흩어졌습니다. 취리히의 츠빙글리는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루터와 만났지만 성찬을 상징으로 볼지 실재로 볼지를 두고 결렬했습니다. 개혁이 시작되자마자 개혁가들끼리 갈라선 것이죠. 제네바의 칼뱅은 신의 주권적 선택을 강조한 신학과 도시 전체를 재조직한 규율로 위그노와 네덜란드 개혁교회와 스코틀랜드 장로교의 뿌리가 됩니다.
가장 급진적인 갈래는 재세례파였습니다. 이들은 아기가 아니라 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사람에게 세례를 준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태어나면 자동으로 교인이 되는 사회 전체를 부정하는 말이었기에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에서 함께 박해받았습니다. 1534년 뮌스터를 장악한 극단 집단의 사건은 탄압에 명분을 더했죠. 살아남은 흐름은 메노 시몬스를 따라 비폭력과 정교 분리로 방향을 잡았고, 오늘의 메노나이트와 아미시가 그 후예입니다. 국가와 교회를 떼어 놓자는 근대의 원칙이 처음 나온 자리가 국가 권력에서 가장 멀리 밀려난 사람들이었다는 점은 곱씹을 만합니다. 잉글랜드의 경우는 또 달라서, 헨리 8세의 정치적 결별이 먼저였고 신학적 정체성은 그 뒤에 형성되었습니다.
로마의 자기 수술과 피로에서 태어난 관용
가톨릭은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성직 매매와 주교의 교구 방치 같은 관행을 손보고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 제도를 만들었으며, 권위의 근거를 성서와 전통 양쪽에 둔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1540년 승인된 예수회는 교육과 선교의 정예 조직이 되었죠. 그래서 역사가들은 이 흐름을 일방적 반동보다 가톨릭 개혁으로 부르는 쪽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공존은 평화로 오지 않았습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만든 원칙은 통치자의 종교가 그 영토의 종교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개인의 양심의 자유가 아니라 통치자의 선택권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 전쟁은 1598년 낭트 칙령으로 봉합되었다가 1685년 철회로 다시 뒤집혔고, 30년 전쟁(1618~1648)은 독일 지역을 폐허로 만든 뒤에야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끝났습니다. 이렇게 얻은 관용은 이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서로를 없앨 수 없다는 피로에서 나왔습니다. 개인의 종교 자유가 원칙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다시 두 세기가 더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갈라지고 지금도 이어 붙입니다
20세기의 가장 큰 사건은 새 교리가 아니라 새 체험이었습니다. 1906년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낡은 건물에서 시작된 부흥은 방언과 치유 같은 성령의 은사를 전면에 내세웠고, 인종이 분리되던 시대에 흑인과 백인이 같은 자리에서 예배했습니다. 여기서 퍼져 나간 오순절 운동은 20세기에 가장 빠르게 자란 흐름이 되어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확산했습니다. 오늘날 세계 그리스도인은 대략 24억 명 규모로 추산되고, 그 가운데 오순절과 은사주의 계열은 집계 기준에 따라 수억 명 규모로 폭넓게 잡힙니다.
반대 방향의 힘도 함께 작동했습니다.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가 출범하며 개신교와 정교회를 아우르는 교파 간 대화가 제도화되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는 자국어 전례를 열고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과 타 종교를 대하는 언어를 바꿨습니다. 갈라짐과 이어 붙임이 동시에 진행 중인 셈이죠. 다음 강에서는 같은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부르면서 전혀 다른 길을 간 세 번째 전통을 만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서로를 없앨 수 없다는 현실 인식에서 나온 관용과, 신념에서 나온 관용은 실제 사회에서 얼마나 다르게 작동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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