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시대 5강.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평생 만날 일 없는 수천만 명을 "우리"라고 부르게 만든 힘. 19세기 유럽 지도를 다시 그린 것은 군대이기 전에 이 감정이었습니다.
풀고 시작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던 사람들
1814년부터 1815년까지 나폴레옹을 꺾은 승전국들이 빈에 모였습니다.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가 주도한 빈 회의의 목표는 명확했습니다. 혁명 이전으로 시계를 되돌리는 것. 쫓겨난 왕가들을 복위시키고, 강대국 간 세력 균형을 맞추고,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싹을 밟는 것이었죠. 이 빈 체제는 한동안 작동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 유럽 전역에 퍼뜨린 두 관념, 국민이 주권자라는 생각과 같은 민족은 하나의 나라를 이뤄야 한다는 생각은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압력은 1848년에 폭발합니다.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몇 주 만에 빈, 베를린, 프라하, 밀라노로 번졌고, 메테르니히 본인이 변장까지 하고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유럽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혁명의 물결이었지만, 결과는 대부분 실패였습니다. 자유주의자, 노동자, 민족주의자의 동맹은 곧 분열했고 구체제 군대가 반격에 성공했으니까요. 그러나 1848년은 무엇이 가능한지, 그리고 누가 같은 편이 아닌지를 모두에게 가르쳐 준 리허설이었습니다.
지도를 다시 그린 두 개의 통일
1848년의 교훈을 가장 냉정하게 흡수한 것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현실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르데냐 왕국의 재상 카보우르가 외교와 전쟁을 조합해 북부를 통합했고, 남부에서는 가리발디가 붉은 셔츠의 의용대 천 명을 이끌고 시칠리아에 상륙해 남부를 휩쓸었습니다. 극적인 장면은 1860년, 가리발디가 정복한 남부를 사르데냐 왕에게 넘겨준 만남입니다. 공화주의자였던 그가 통일을 위해 왕에게 성과를 양보한 것이죠.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됩니다. 독일에서는 프로이센 재상 비스마르크가 주역이었습니다. 연설과 다수결이 아니라 철과 피로 시대의 문제가 결정된다는 그의 말대로, 프로이센은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세 차례 전쟁을 거쳐 1871년 독일 제국을 선포합니다. 장소가 상징적이었습니다. 파리 근교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 프랑스의 심장에서 독일 통일을 선언한 이 장면은 두 나라의 긴 적대에 불을 붙였습니다.
해방의 얼굴, 배제의 얼굴
민족주의는 야누스의 얼굴을 갖고 있습니다. 한쪽 얼굴은 해방입니다. 오스만 제국에 맞선 그리스 독립 전쟁, 열강의 지배에 맞선 약소민족들의 저항에서 민족주의는 자유의 언어였습니다. 시인 바이런이 그리스 독립을 위해 참전했다 병사한 것처럼, 19세기 유럽의 진보파에게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한 묶음이었죠. 그런데 다른 쪽 얼굴은 배제입니다. 우리가 하나의 민족이라는 말은 필연적으로 누가 우리가 아닌지를 정의합니다. 19세기 후반으로 갈수록 민족주의는 소수 민족 억압, 반유대주의, 그리고 우리 민족의 우월함을 내세운 팽창의 논리와 결합해 갔습니다. 같은 원리가 어디서는 독립운동의 무기가 되고 어디서는 침략과 학살의 명분이 되는 것. 이것이 민족주의를 다루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민족은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민족이란 대체 무엇일까요. 20세기 학계의 유력한 답은 민족이 태곳적부터 있던 실체가 아니라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쪽입니다.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논의가 대표적입니다. 서로 평생 만날 일 없는 수백만 명이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표준어로 인쇄된 소설을 읽으면서, 같은 시간을 사는 하나의 공동체라는 감각을 갖게 됐다는 것이죠. 그가 지목한 엔진이 인쇄 자본주의였습니다.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앤서니 스미스처럼 근대 민족이 무에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전근대의 종족적 유대 위에 세워졌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다만 만들어졌다는 것이 가짜라는 뜻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그것을 위해 기꺼이 죽는다는 점에서, 상상의 공동체는 가장 실재적인 힘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 힘이 산업혁명의 생산력과 결합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다음 과목 제국주의와 세계대전에서 확인하게 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만들어진 공동체를 위해 사람들이 목숨을 바친다면, 그 공동체를 허구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한 표현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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