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3강. 세계 제국과 맞선 30년, 그 이후
유라시아를 삼킨 제국 앞에서 고려는 30년을 버텼습니다. 그리고 버틴 대가로, 왕이 변발을 하는 100년이 시작됩니다.
풀고 시작
저고여의 죽음에서 시작된 30년
1225년,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국경에서 살해됩니다. 범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몽골은 이를 구실로 삼았고, 1231년 살리타가 이끄는 군대가 압록강을 건넙니다. 이때부터 1259년까지 이어진 침입은 보통 여섯 차례로 헤아립니다. 당시 실권자였던 최우는 1232년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 결단을 내립니다. 개경에서 지척인 이 섬은 조수가 험해 기병이 접근하기 어려웠고, 조운로가 닿아 세금은 계속 걷을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강화도는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죠.
그런데 이 결정에는 아픈 이면이 있습니다. 지배층은 섬으로 들어갔지만 육지의 백성은 산성과 섬으로 흩어져 스스로 싸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대몽항쟁의 명장면은 정규군이 아니라 민중 쪽에서 나옵니다. 1232년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이끄는 부곡민들이 총사령관 살리타를 활로 쓰러뜨렸습니다. 『고려사』에는 김윤후 자신이 그 공을 사양했다는 대목도 있어 활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사령관을 잃은 몽골군이 이 싸움 뒤 물러났고 그 성을 지킨 쪽이 정규군이 아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1253년 충주성에서는 김윤후가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신분을 가리지 않고 싸워 성을 지켜냅니다. 강화 천도를 항전 의지로 볼 것인가 지배층의 도피로 볼 것인가는 지금도 평가가 갈리는 문제입니다.
나무 8만 장에 새긴 발원
1232년 몽골군은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초조대장경 목판을 불태웁니다. 거란 침입 때 만들어 200년 넘게 지켜온 국가적 보물이 하루아침에 재가 된 것입니다. 고려의 대응은 뜻밖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그것도 피난지에서 대장경을 다시 새기기로 한 것이죠. 강화도에 대장도감을 두고 남해 등지의 분사에서 나누어 판을 새긴 것으로 봅니다. 1236년부터 1251년까지 16년이 걸렸고, 완성된 경판은 8만 1천여 장에 이릅니다. 이것이 팔만대장경이고 지금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에 있습니다.
이규보가 쓴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은 부처의 힘을 빌려 오랑캐를 물리치겠다는 발원을 담고 있습니다. 냉정히 보면 이 사업은 군사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5천만 자가 넘는 글자에 오탈자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나라가 무너지는 와중에도 이 정도 조직력과 교정 체계를 유지했다는 증거입니다. 목판 인쇄 기술의 이 축적이 다음 강에서 볼 금속활자로 이어집니다.
부마국이라는 이름의 사슬
1258년 최의가 피살되면서 4대 60여 년을 이어온 최씨 정권이 먼저 무너지고, 이듬해 태자가 몽골에 들어가 강화가 성립합니다. 무신정권 자체는 1270년 임유무가 제거되면서 끝났고, 곧바로 개경 환도가 결정됩니다. 이에 반발한 삼별초는 배중손을 앞세워 진도로, 다시 김통정을 따라 제주로 옮겨 가며 1273년까지 저항했습니다. 이 항쟁 역시 자주적 항전으로 보는 시각과 무신정권 사병 집단의 생존 투쟁으로 보는 시각이 함께 존재합니다.
이후 약 100년이 원 간섭기입니다. 고려는 멸망하지도 직접 통치를 받지도 않았지만, 원 황실의 사위 나라 곧 부마국이 됩니다. 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한 뒤 왕들은 이름 앞에 충성 충 자를 달았고, 조와 종 대신 왕을 칭하게 됩니다. 중서문하성과 상서성은 첨의부로, 6부는 4사로 격하됐죠. 일본 원정을 위해 세운 정동행성은 원정이 실패한 뒤에도 남아 내정 간섭 기구가 되었고, 쌍성총관부와 동녕부, 탐라총관부는 영토 일부를 떼어 갔습니다. 무엇보다 무거운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공녀로 끌려간 여성들과 매를 바치기 위해 운영된 응방은 백성에게 직접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지배층 사이에는 변발과 호복 같은 몽골풍이 퍼졌고, 반대로 원에는 고려양이 유행했습니다. 이 시기 고려가 몽골이 만든 유라시아 교통망에 편입되면서 성리학과 목화, 화약 지식이 들어왔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합니다. 제국 자체의 구조는 세계사 몽골 강에서 다룹니다.
왕이 변발을 자르다
1351년 즉위한 공민왕은 원에서 자란 왕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즉위 직후 변발과 호복을 벗어던집니다. 계산도 깔려 있었습니다. 홍건적의 난으로 원이 흔들리기 시작했거든요. 1356년 공민왕은 원의 힘을 업고 권세를 부리던 기철 일파를 제거하고,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며, 군대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되찾아 철령 이북 땅을 회복합니다. 관제도 원래대로 돌렸습니다.
1365년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뒤 공민왕은 정사에서 한발 물러났고, 내정 개혁의 칼자루는 승려 신돈에게 넘어갑니다. 1366년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은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기구였고, 이듬해 성균관을 다시 세워 성리학을 배운 신진 관료를 길러냅니다. 그러나 개혁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기득권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신돈은 1371년 반역 혐의로 제거됐고, 공민왕 자신도 1374년 측근에게 시해당합니다. 남은 것은 홍건적과 왜구를 막아내며 성장한 최영과 이성계라는 두 무장이었습니다. 왕조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죠. 하지만 이 전쟁과 간섭의 100년 동안에도 고려는 청자를 굽고 활자를 부었습니다. 다음 강의 이야기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지배층은 섬으로 들어가고 백성은 육지에 남아 싸웠습니다. 이런 항쟁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어 부르는 것은 정당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