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역학 4강. 통계역학: 거시와 미시의 다리
분자 하나하나는 예측 불가능한데 기체 전체는 정확한 법칙을 따릅니다. 확실성은 무지의 반대가 아니라 무지의 평균에서 나옵니다.
풀고 시작
기체를 당구공 무리로 보다
기체 분자 운동론(kinetic theory)의 씨앗은 일찍 뿌려졌습니다. 1738년 베르누이(Daniel Bernoulli)는 기체를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작은 입자들의 무리로 보면 압력이 설명된다고 제안했죠. 이 그림이 진지한 물리학이 된 것은 19세기 중반, 클라우지우스와 맥스웰(Maxwell)의 손에서입니다. 발상의 핵심은 대담한 포기에 있습니다. 분자 10²³개의 궤적을 하나하나 추적하는 것은 불가능하니, 개별 분자를 포기하고 분포를 다루자는 것이죠. 1860년 맥스웰은 평형 상태 기체에서 분자 속도가 따르는 확률 분포(맥스웰 분포)를 유도했습니다. 물리학의 방정식에 확률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순간입니다. 상온의 공기 분자는 평균 초속 수백 미터로 날며, 느린 분자와 빠른 분자가 정해진 비율로 섞여 있습니다.
압력과 온도의 번역
이 그림 위에서 거시 개념들이 미시 언어로 번역됩니다. 압력은 분자들이 벽에 충돌하며 전달하는 운동량의 초당 합계입니다. 부피를 절반으로 줄이면 충돌 빈도가 두 배가 되어 압력이 두 배가 되죠. 보일의 법칙이 당구공 계산에서 도출되는 것입니다. 온도는 1강에서 예고한 대로 분자 평균 운동 에너지의 척도이며, 이상기체에서 평균 운동 에너지는 절대온도에 정비례합니다. 실험실에서 굴러온 경험 법칙인 이상기체 상태방정식 PV = NkT가 통째로 유도됩니다. 여기서 k가 볼츠만 상수, 3강의 S = k log W에 등장한 바로 그 상수입니다. 거시(열역학)와 미시(역학)를 잇는 환율 상수인 셈이죠.
맥스웰의 도깨비
1867년 맥스웰은 스스로 만든 다리를 시험하는 사고실험을 내놓았습니다. 기체 상자를 둘로 나누고 칸막이의 작은 문을 지키는 존재를 상상해 보죠. 이 존재(훗날 켈빈이 도깨비, demon라 불렀습니다)는 빠른 분자만 오른쪽으로, 느린 분자만 왼쪽으로 통과시킵니다. 일을 하지 않고 문만 여닫았을 뿐인데 오른쪽은 뜨거워지고 왼쪽은 차가워집니다. 엔트로피가 감소한 것이죠. 제2법칙이 지능 앞에서 무너지는 걸까요? 역설은 20세기에 와서야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실라르드(Szilard, 1929)는 도깨비가 분자를 측정해 정보를 얻어야 함을 짚었고, 란다우어(Landauer, 1961)가 결정타를 놓았습니다. 정보를 지우는 데는 최소 비용이 듭니다. 1비트를 지울 때마다 최소 kT log 2의 열이 방출되죠(란다우어 원리). 유한한 기억을 가진 도깨비는 언젠가 기록을 지워야 하고, 그 삭제의 열이 벌어들인 엔트로피 감소를 정확히 상쇄합니다. 정보는 물리적이라는 것, 이것이 도깨비가 남긴 유산이며 현대 컴퓨팅과 양자정보 이론의 출발점 중 하나입니다.
확실성은 큰 수에서 나온다
마지막으로 근본 질문 하나가 남습니다. 통계역학의 토대는 확률인데 왜 열역학 법칙은 한 치의 오차 없이 확실해 보일까요? 답은 수학 서가의 확률론이 주는 큰 수의 법칙에 있습니다. 동전 10개를 던지면 앞면 비율이 크게 요동하지만 10²³개를 던지면 비율은 사실상 정확히 1/2에 못 박힙니다. 상대적 요동이 대략 1/√N으로 줄어들기 때문이죠. 기체 분자 수 규모에서 이 요동은 측정 불가능할 만큼 작습니다. 열역학의 철칙 같은 확실성은 개별 분자의 무작위성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무작위가 큰 수 속에서 스스로를 지워버리기 때문에 생깁니다. 법칙의 확실성이 확률에서 태어난다는 이 역설적 통찰은 이후 양자역학(현대물리 과목)에서 확률이 더 깊은 층위로 내려갈 때 다시 소환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정보는 물리적이다"라는 란다우어의 표어를 받아들이면, 지식이나 기억 같은 개념도 결국 열역학의 지배를 받을까요? 생각하는 일에도 최소한의 에너지 비용이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