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4강. 87년 이후: 우리가 사는 한국
민주화는 결승선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부터가 진짜 경기였습니다.
풀고 시작
87년 체제라는 그릇
1987년 개헌으로 만들어진 헌법은 지금까지 그대로입니다.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고 5년 단임으로 못 박은 이 설계는 장기 집권을 막겠다는 그 시대의 절박함에서 나왔죠. 그런데 이 그릇에 담긴 정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군의 사조직이 정리되고 금융실명제가 시행됐으며, 1995년에는 지방자치가 전면 실시됩니다. 그리고 1997년 대선에서 헌정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정권이 평화적으로 넘어갑니다. 선거로 정권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실제로 증명된 순간이었죠. 이후로도 정권 교체는 여러 차례 반복됐고, 헌법이 정한 탄핵 절차가 실제로 작동해 대통령이 파면된 일도 두 번 있었습니다. 2016년 겨울 촛불집회 국면에서 국회가 탄핵을 소추해 2017년 3월 헌법재판소가 파면을 결정했고, 2024년 12월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는 국회가 그날 밤을 넘기지 않고 계엄 해제를 의결한 뒤 탄핵소추로 이어져 2025년 4월 다시 파면 결정이 나왔습니다. 평가는 사람마다 갈리지만, 갈등이 거리에서 시작되어 헌법 절차 안에서 매듭지어졌다는 형식만큼은 87년 체제의 작동 방식을 보여줍니다.
1997년 12월, 나라가 부도났습니다
민주화의 성취감이 채 가시기 전에 예상 못 한 곳에서 둑이 터졌습니다. 1997년 말 외환보유액이 바닥나면서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에 구제금융을 요청합니다. 조건은 가혹했습니다. 고금리와 긴축, 기업과 금융의 구조조정, 노동시장 유연화였죠.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지고 은행이 통폐합됐으며, 정리해고가 제도로 자리 잡고 비정규직이 급격히 늘어납니다. 시민들이 금을 모아 내놓는 장면이 상징처럼 남았고, 차입금은 2001년에 예정보다 앞당겨 모두 갚습니다. 그러나 되돌아오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관념이 사라졌고, 고용 형태에 따라 삶의 조건이 갈리는 구조가 이때 굳어졌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가 이야기하는 격차 문제의 많은 부분이 이 시기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세계가 한국을 소비하기 시작하다
의외인 것은 그 위기의 한복판에서 문화 수출이 시작됐다는 점입니다. 1990년대 후반 드라마와 가요가 중화권에서 인기를 끌며 한류라는 말이 생겼고, 2000년대에는 겨울연가와 대장금이 일본과 아시아 전역으로 퍼집니다. 2012년 강남스타일이 유튜브를 타고 전 세계로 번졌고, 2020년에는 기생충이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았으며 이듬해 오징어 게임이 세계 시청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방탄소년단은 빌보드 정상에 올랐죠. 이것을 국가 홍보의 성공으로만 읽으면 절반만 본 것입니다. 오히려 검열이 약해지고 시장이 열리며 창작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민주화 이후의 조건, 그리고 인터넷과 플랫폼이라는 새 유통망이 겹친 결과에 가깝습니다.
남북, 반복되는 진자
남북 관계는 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1998년 시작된 금강산 관광에 이어 2000년 첫 남북정상회담으로 이산가족 상봉이 재개됐고, 2000년대 중반에는 개성공단까지 문을 열며 경제 협력이 확대됩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이 거듭되며 제재가 강화됐고 협력 사업은 하나씩 멈췄습니다. 2018년에는 다시 정상회담이 열리고 북미 대화까지 이어졌지만 합의는 지속되지 못했습니다. 접근과 경색이 반복되는 이 진자 운동에서 무엇이 원인이고 무엇이 결과인지에 대한 해석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크게 갈립니다. 분명한 것은 2강에서 본 정전협정 체제가 아직 그대로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물려받은 숙제
지금 한국이 마주한 문제는 성장이 아니라 지속입니다. 합계출산율은 0.7명대까지 내려가 세계 최저 수준을 기록했고, 2024년에는 65세 이상 인구 비율이 20%를 넘어 초고령사회에 들어섰습니다. 수도권 집중과 지방 소멸, 자산 격차와 고용 형태에 따른 이중 구조도 함께 놓여 있습니다. 이것들은 어느 한 정권의 실책으로 설명되지 않는, 압축 성장과 급속한 사회 변동이 함께 만들어낸 구조적 문제에 가깝습니다. 여기서 한국사 서가를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청동기 마을에서 시작해 고조선과 삼국, 고려와 조선, 식민지와 전쟁, 산업화와 민주화를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 긴 이야기가 알려주는 것은 하나입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은 대부분 누군가가 어렵게 만들어 넘겨준 것이고, 지금 우리가 하는 선택 역시 다음 세대의 당연함이 됩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87년에 만들어진 헌법 체제는 지금의 사회 갈등을 담기에 충분한 그릇일까요?
- 저출생과 양극화 같은 문제는 성장의 실패가 아니라 성장의 결과일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