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개항기 2강. 3일 천하: 갑신정변의 꿈과 좌절
조선의 첫 근대 정변은 우체국 개국 축하연에서 시작해 사흘 만에 끝났습니다.
풀고 시작
봉급 대신 겨와 모래를 받은 군인들
1882년 여름, 서울의 구식 군인들은 열세 달째 급료를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나온 쌀자루를 열어 보니 겨와 모래가 섞여 있었죠. 같은 시각 신식 군대 별기군은 일본인 교관에게 훈련받으며 좋은 대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분노는 폭발했고, 여기에 쌀값 폭등에 시달리던 도시 빈민이 합류하면서 임오군란이 됩니다. 군인들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했고 하나부사 공사는 인천으로 달아났으며, 궁궐이 뚫리자 명성황후는 궁을 빠져나가 몸을 숨겼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올랐죠.
그런데 반전이 옵니다. 청이 3천여 병력을 보내 사태를 진압하고,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 가 버립니다. 재집권은 33일 만에 끝났습니다. 뒷수습으로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어 배상금을 물고 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을 허용했고, 청과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맺었습니다. 이 문서는 서문에 조선을 청의 속방이라 못 박고 청 상인의 내지 통상을 열어 주었습니다. 개항으로 연 문에 청이 먼저 들어와 앉은 셈입니다. 청군은 그대로 서울에 주둔했고, 그 부대와 함께 들어온 젊은 장교 위안스카이는 이후 조선의 내정에 깊숙이 개입하게 됩니다.
개화를 막으려 한 상소들
군란의 밑바닥에 봉급 문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개화 자체를 거부하는 흐름이 이미 굵게 자라 있었죠. 1881년, 수신사 김홍집이 들여온 『조선책략』이 퍼지자 유생들의 척사 상소가 잇따랐습니다. 강원도 유생 홍재학은 국왕의 개화 정책을 정면으로 겨눈 상소를 올렸다가 처형되었고, 같은 해 흥선대원군의 서자 이재선을 왕으로 세우려던 모의가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도 개화에 대한 반감이 깔려 있었죠. 위정척사는 이미 상소를 넘어 정변의 문턱까지 와 있었던 셈입니다. 이 흐름은 사라지지 않고 뒷날 을미의병으로 이어집니다.
같은 개화, 다른 속도
개화파는 원래 한 덩어리였습니다. 박규수의 사랑방에 모여 세계 지리서를 돌려 읽던 젊은 양반들이 그 출발이었죠. 그런데 임오군란 뒤 청의 압박이 노골적으로 변하자 노선이 갈립니다.
| 구분 | 온건 개화파 | 급진 개화파 |
|---|---|---|
| 인물 |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
| 모델 | 청의 양무운동 | 일본의 메이지 유신 |
| 방식 | 동도서기, 유교 질서는 두고 기술만 수용 | 문명개화, 제도와 사상까지 교체 |
| 청에 대한 태도 | 현실적 후원자로 인정 | 걷어내야 할 굴레로 규정 |
핵심 쟁점은 기술의 속도가 아니라 청을 어떻게 볼 것인가였습니다. 급진파에게 청의 종주권을 인정한 채 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연장된 예속이었죠.
우정총국의 사흘
1884년 12월 4일,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이 열립니다. 총판은 개화당의 홍영식이었습니다. 때마침 청은 베트남을 놓고 프랑스와 싸우느라 조선 주둔 병력을 절반이나 빼 간 상태였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는 병력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축하연 도중 불길이 오르고 정변이 시작됩니다.
이튿날 발표된 14개조 정강은 지금 읽어도 급진적입니다. 청에 대한 조공의 허례를 폐지하고, 문벌을 없애 인민평등권을 세우며, 지조법을 고치고, 보부상 특권 기구인 혜상공국을 혁파하고, 국가 재정을 호조로 일원화한다는 내용이었죠. 조선의 공식 문서가 신분 위계 자체를 정면으로 겨눈 첫 사례였습니다.
그러나 12월 6일, 위안스카이가 이끄는 청군이 창덕궁으로 밀고 들어옵니다. 일본군은 곧바로 물러섰고, 개화당 정부는 붕괴합니다. 고종 곁을 지키던 홍영식과 박영교는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김옥균은 10년 뒤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당합니다. 실패의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병력을 남에게 빌렸고, 정강 어디에도 농민이 가장 절박하게 원하던 토지 문제가 없었습니다. 서울 민중에게 개화당은 왜당으로 보였을 뿐이죠.
사흘 뒤에 남은 것
정변은 끝났지만 청구서는 남았습니다. 조선은 일본과 한성조약을 맺어 또 배상했고, 청과 일본은 1885년 톈진조약으로 양국 군대를 함께 빼되 앞으로 조선에 파병할 때는 서로에게 미리 알리기로 합니다. 언뜻 평화 장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한쪽이 들어오면 다른 쪽도 자동으로 들어올 수 있는 문이었습니다. 9년 뒤 이 조항이 청일전쟁의 방아쇠가 됩니다.
같은 해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다며 남해의 거문도를 무단 점령하고 해밀턴항이라 불렀습니다. 조선의 항의는 아무 힘이 없었고, 2년 뒤 청의 중재로 영국군이 물러났죠. 자기 영토가 열강의 협상 카드로 오가는 것을 지켜본 이 경험에서 조선 중립화론이 나옵니다. 독일 부영사 부들러가 제안했고, 유길준도 열강이 함께 보장하는 중립국 구상을 내놓았습니다.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조선이 스스로를 국제 체제 안에서 사고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이기는 합니다. 그러는 사이 위에서가 아니라 아래에서 자라던 다른 힘이 있었습니다. 다음 강에서 만날 1894년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으로 흔히 외세 의존과 민중 기반 부재가 함께 꼽힙니다. 둘 중 어느 쪽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보시나요. 만약 청군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개화당 정부는 유지될 수 있었을지 근거를 들어 논증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