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2강. 문벌의 시대, 칼의 시대
시험으로 열린 문은 다시 가문으로 닫혔습니다. 그 닫힌 문을 1170년, 칼이 부수고 들어옵니다.
풀고 시작
시험의 나라가 가문의 나라로
광종의 과거제는 시험으로 인재를 뽑는 제도였지만, 몇 세대가 지나자 역설이 생깁니다. 과거에 합격한 집안이 대를 이어 고위직을 차지하고, 왕실과 겹겹이 혼인하면서 문벌이라는 새로운 귀족층이 형성된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안전장치도 있었습니다. 5품 이상 관리의 자손은 시험 없이 관직에 오르는 음서, 자손에게 세습되는 토지인 공음전입니다. 문이 열린 사회처럼 보였지만 위층으로 가는 계단은 특정 가문이 독점한 셈이죠. 그 정점이 경원 이씨(인주 이씨) 가문입니다. 대대로 왕비를 배출하며 80여 년간 권세를 누렸고,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 두 왕에게 연달아 딸들을 시집보내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 되었습니다. 1126년 이자겸은 십팔자(十八子), 곧 이씨가 왕이 된다는 참설을 등에 업고 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지만, 궁궐이 불타면서 왕조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집니다.
묘청, 실패한 반역자인가 좌절된 자주파인가
흔들리는 인종 앞에 서경 출신 승려 묘청이 나타나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개경은 기운이 다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고, 황제를 칭하며 독자 연호를 쓰고,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것입니다.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개경 문벌은 현실론으로 맞섰고, 천도가 좌절되자 묘청은 1135년 서경에서 나라 이름을 대위, 연호를 천개로 선포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반란은 약 1년 만에 김부식에게 진압당했죠. 그런데 이 사건의 평가는 지금도 논쟁적입니다. 일제강점기 역사가 신채호는 이를 조선 역사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부르며, 자주적 낭가 사상이 사대적 유교에 패배한 분수령으로 해석했습니다. 반면 현대 학계에는 서경 세력의 권력 다툼이라는 측면과 풍수 도참에 기댄 무리한 기획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진압 이후 문벌의 독주에 견제 세력이 사라졌다는 사실입니다.
보현원의 밤, 세상이 뒤집히다
문벌 전성기의 이면에서 무신들은 굴욕을 삭이고 있었습니다. 무신은 아무리 공을 세워도 고위직 승진이 막혔고, 젊은 문신이 대장군의 뺨을 때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촛불로 대장군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일화는 이 멸시의 상징으로 전해집니다. 1170년, 놀이에 빠진 의종이 보현원으로 행차하던 날 정중부와 이의방 등이 마침내 칼을 뽑습니다. 문신의 관을 쓴 자는 모두 죽이라는 말과 함께 하룻밤 사이 조정이 피로 물들었고, 왕은 폐위됩니다. 이것이 무신정변입니다. 이후 무신들끼리 죽고 죽이는 혼란이 이어지다가 1196년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최씨 가문이 4대 60여 년간 이어지는 안정된 독재를 구축합니다. 최씨 정권은 교정도감이라는 사설 기구로 국정을 처리하고 도방과 삼별초 같은 사병으로 권력을 지켰습니다. 왕은 있으되 다스리지 않는 시대였죠.
만적, 씨가 따로 있느냐고 묻다
무신정변은 뜻밖의 사상적 충격파를 낳았습니다. 천대받던 무신이 하루아침에 최고 권력자가 되는 것을 본 하층민들이 신분이란 무엇인가를 묻기 시작한 것입니다. 1198년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은 개경의 노비들을 모아 봉기를 모의하며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 정변 이래 고관대작이 천민에서 많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거사는 밀고로 실패하고 만적 등은 강물에 던져졌지만, 노비가 권력의 논리를 정확히 꿰뚫어 본 이 사건은 무신 집권기 전국에서 터져 나온 농민과 천민 봉기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칼로 세운 정권이 흔들리는 사이, 북방에서는 세계 제국 몽골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다음 강의 이야기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시험으로 뽑는 제도가 몇 세대 만에 세습 귀족을 낳았습니다. 오늘날의 능력주의는 이 역설에서 자유로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