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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 3강. 1894: 아래로부터의 혁명, 위로부터의 개혁

같은 해에 농민은 아래에서 낡은 질서를 부수려 했고, 정부는 위에서 그것을 문서로 폐지했습니다. 그리고 두 흐름은 끝내 만나지 못했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1894년 조선 정부가 농민군 진압을 위해 청에 파병을 요청한 것이 부른 직접적 결과는?
1885년 톈진조약에는 한쪽이 조선에 파병하면 다른 쪽에 미리 알린다는 조항이 있었고, 일본은 이를 출병 근거로 삼았습니다. 농민군은 오히려 외국 군대의 명분을 없애려 정부와 화약을 맺고 물러났지만 일본군은 철수하지 않았죠. 진압을 요청한 파병이 전쟁을 불러온 것입니다.

저수지 하나에서 시작된 불

1894년 초 전라도 고부의 농민들은 저수지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군수 조병갑이 멀쩡한 보가 있는데도 만석보를 새로 쌓게 하고는, 농민을 강제로 동원해 놓고 물세까지 걷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공적비를 세운다며 돈을 뜯어내기도 했죠. 전봉준을 앞세운 농민들이 관아를 습격하면서 봉기가 터집니다.

여기까지는 조선 후기에 흔하던 민란이었습니다. 사태를 수습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가 봉기 가담자를 모조리 동학교도로 몰아 잡아들이면서 성격이 달라집니다. 고을 단위의 분노가 동학이라는 전국 조직망을 타고 번진 것입니다. 무장에서 기포한 농민군은 백산에 집결해 보국안민과 제폭구민을 내걸었고, 황토현과 황룡촌에서 관군을 잇달아 격파한 뒤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성까지 점령합니다. 놀란 정부는 청에 원병을 청했고, 청군이 아산에 상륙하자 일본군이 인천에 들어옵니다.

농민이 군현을 운영하다

농민군의 다음 선택이 이 운동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외국 군대가 들어올 명분을 없애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 전주성에서 물러나기로 하고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었습니다. 조건은 폐정을 개혁한다는 약속이었죠.

그리고 전라도 각 군현에 집강소가 설치됩니다. 농민군 대표가 지방관과 함께 행정에 참여해 개혁을 직접 집행하는 기구였습니다. 봉기 세력이 통치 기구 안으로 들어간 이 장면은 한국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습니다. 이때의 요구가 이른바 폐정개혁 12개조로 전해지는데, 노비 문서를 불태우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며 무명잡세를 없애고 토지를 평균하여 나누어 짓자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이 12개조는 오지영이 훨씬 뒤에 쓴 『동학사』에 실린 것이어서 문구를 그대로 당대 강령으로 볼 수 있느냐를 두고 학계에 논쟁이 있습니다. 요구의 방향 자체는 여러 자료로 확인되지만, 조항 하나하나의 표현은 조심스럽게 다루는 편이 정확합니다.

남의 전쟁터가 된 땅

농민군이 물러났는데도 일본군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1894년 7월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해 정권을 갈아치우고, 곧바로 아산만 입구 풍도 앞바다에서 청 함대를 기습하며 청일전쟁을 시작합니다. 전쟁터는 평양이었고 황해였습니다. 조선의 왕궁이 점령당한 채 남의 나라 두 군대가 조선 땅에서 싸운 것이죠.

이것을 보고 농민군이 다시 일어섭니다. 1차 봉기가 탐관오리를 겨눴다면 2차 봉기의 상대는 일본이었습니다. 그동안 무장 봉기에 거리를 두던 북접의 손병희 세력까지 합류해 논산에 집결했고, 서울로 가는 길목인 공주로 향합니다. 그해 겨울, 우금치 고개에서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근대식 화력 앞에 무너집니다. 죽창과 화승총으로는 연발 소총과 기관포 앞에 설 수 없었습니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붙잡혀 이듬해 처형됩니다.

문서로 무너진 신분제

같은 시각 서울에서는 정반대 방식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경복궁 점령 직후 세워진 김홍집 내각은 군국기무처를 두고 몇 달 만에 수백 건의 개혁안을 쏟아냅니다. 이것이 갑오개혁입니다.

1차 개혁은 청의 연호 대신 개국 기년을 쓰고, 과거제를 없애고, 공사 노비법을 혁파해 신분제를 법적으로 폐지했습니다. 조혼을 금지하고 과부의 재가를 허용했으며 연좌제를 없앴고, 왕실 재정과 국가 재정을 분리해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했습니다. 2차 개혁에서는 홍범 14조를 반포하고 지방 제도를 23부로 개편했으며 재판소를 세워 사법을 행정에서 떼어냅니다. 교육입국조서로 근대 학교 제도의 틀도 잡았죠. 조선 사회를 수백 년 지탱한 신분 질서가 문서 몇 장으로 사라진 것입니다.

타율인가 자율인가

문제는 이 개혁이 일본군의 궁궐 점령 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갑오개혁을 일본이 조선을 통제하기 위해 밀어붙인 타율적 개혁으로 보는 시각이 오래 힘을 가졌습니다.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초기 군국기무처는 일본이 청과의 전쟁에 몰두하던 시기에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움직였고, 그 개혁안의 내용은 갑신정변 정강과 농민군의 요구를 상당 부분 담고 있었다는 것이죠. 신분제 폐지와 과부 재가 허용은 농민군이 목숨 걸고 외친 항목이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는 개화파의 오랜 구상이 일본의 개입이라는 조건 아래 굴절된 형태로 실현되었다고 보는 절충적 이해가 넓게 받아들여집니다.

분명한 한계는 있습니다. 농민이 가장 절실히 원한 토지 문제에 손대지 않았고, 군제 개혁은 미뤄졌으며, 개혁을 지지해 줄 사회적 기반이 없었습니다. 아래의 힘은 우금치에서 꺾였고 위의 개혁은 뿌리가 없었죠. 다음 강에서는 이 공백 위로 밀려드는 을미사변과 대한제국의 시간을 다룹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각 군현에 설치된 집강소의 성격으로 옳은 것은?
집강소는 봉기 세력이 통치 기구 안으로 들어가 개혁을 스스로 집행한 사례로, 한국사에서 보기 드문 형태입니다. 정부의 감시 기구나 종교 조직이 아니라 행정 참여 기구였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문제 2. 폐정개혁 12개조를 다룰 때 주의해야 할 점은?
농민군이 신분 차별 철폐와 잡세 폐지 등을 요구했다는 사실 자체는 여러 자료로 뒷받침되지만, 널리 인용되는 12개조 문구는 후대에 정리된 기록이라 사료 비판이 필요합니다. 방향은 인정하되 문구는 신중히 다루는 것이 학계의 태도입니다.
문제 3. 2차 봉기의 우금치 전투에서 농민군이 참패한 결정적 요인은?
2차 봉기에는 그동안 무장 봉기에 신중하던 북접까지 합류해 병력은 오히려 늘었습니다. 문제는 화력의 세대 차이였고, 반복된 돌격은 큰 희생만 남겼습니다. 근대 무기 앞에서 수적 우세가 무력해진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문제 4. 갑오개혁 1차 시기에 실제로 시행된 조치는?
과거제 폐지와 신분제의 법적 철폐, 재정 일원화가 1차 개혁의 대표 조치입니다. 단발령과 태양력은 이듬해 을미개혁의 내용이고, 지계 발급은 대한제국 광무개혁의 사업이며, 토지 평균 분작은 농민군의 요구였을 뿐 개혁안에는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아래로부터의 요구와 위로부터의 개혁이 1894년에 일부 겹쳤는데도 끝내 결합하지 못했습니다. 두 흐름이 만나려면 무엇이 더 필요했을지, 그리고 토지 문제가 빠진 것이 왜 결정적이었는지 논의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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