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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3강. 두 개의 기적: 한강과 광장

한국은 30년 만에 가난을 벗었고, 같은 30년 만에 독재를 벗었습니다. 두 기적의 계산서는 서로 다릅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1987년 6월 항쟁의 직접적인 결과로 이루어진 헌정상의 변화는?
6월 항쟁의 요구는 호헌 철폐와 직선제 쟁취였고, 6.29 선언을 거쳐 그해 10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헌법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87년 체제입니다. 지방자치 전면 실시는 1990년대 중반의 일이고, 내각제 개헌이나 국가보안법 폐지는 당시 개헌의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4월의 학생과 5월의 군인

1960년 3월 15일 선거는 노골적인 부정선거였습니다.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 도중 실종됐던 마산상고 입학 예정자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4월 11일 바다에서 떠오르면서 분노가 전국으로 번집니다. 4월 19일 서울에서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나섰고, 일주일 만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합니다. 시민의 힘으로 정권을 무너뜨린 첫 경험이었죠. 그런데 4.19가 열어젖힌 공간은 1년을 버티지 못했습니다. 내각제로 출범한 제2공화국은 폭발한 요구들을 감당하지 못했고,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인들이 정권을 잡습니다. 한국 현대사의 두 흐름, 광장과 국가주도 개발이 이 1년 사이에 나란히 시작된 것입니다.

한강의 기적, 그리고 계산서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방향이 분명했습니다. 내수 시장이 없으니 밖에 팔아서 벌겠다는 수출주도 전략이었죠. 정부가 자금과 외자를 배분하고 특정 기업을 골라 밀어주는 방식이었습니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넘겼고 1977년에는 100억 달러를 돌파합니다. 재원은 한일협정 청구권 자금, 베트남 파병 대가, 차관, 그리고 저임금 노동에서 나왔습니다. 그 계산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사건이 1970년 11월 13일입니다.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책을 안고 몸에 불을 붙이며 법을 지키라고 외쳤습니다.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는 법이 지켜지지 않아서 죽은 것이죠. 이 시기 평가는 지금도 갈립니다. 정부의 전략적 개입이 압축 성장을 만들었다는 설명과, 성장의 동력은 유능한 노동력과 유리한 국제 환경에 있었고 국가는 그 과실을 특정 집단에 몰아주었다는 반론이 함께 있습니다.

유신, 그리고 부산과 마산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국회를 해산하고 새 헌법을 만듭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국민이 아닌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게 하고 임기 제한을 없앴으며, 대통령이 국회의원 3분의 1을 사실상 지명하고 긴급조치로 헌법상 권리를 정지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선거로 정권을 바꿀 경로 자체를 닫아버린 것입니다. 그러자 저항은 거리로만 나올 수 있게 됐죠. 1979년 8월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의 농성이 강제 진압됐고, 10월 초 야당 총재가 의원직에서 제명되자 곧바로 부산과 마산에서 시민 항쟁이 터집니다. 부마항쟁 대응을 둘러싼 정권 내부의 갈등 속에서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되며 유신 체제는 끝납니다.

5월 광주

유신이 끝났다고 봄이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군을 장악했고,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됩니다. 다음 날 광주에서 시위에 나선 학생과 시민을 향해 공수부대가 투입됩니다. 무자비한 진압에 시민들이 무장했고, 5월 21일 계엄군이 시 외곽으로 물러난 뒤 닷새 남짓 시민들이 스스로 질서를 유지하는 자치 상태가 이어졌습니다. 그 안에서 약탈은 거의 없었고 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누고 헌혈에 줄을 섰습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다시 밀고 들어오며 항쟁은 끝났습니다. 공식 확인된 희생자만 수백 명이고, 행방불명자를 포함한 전체 규모는 지금도 조사가 진행 중입니다. 오랫동안 폭동으로 불렸던 이 사건은 1995년 특별법 제정과 1997년 국가기념일 지정을 거쳐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1987년 6월, 광장이 이기다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조사 중 고문으로 사망합니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발표가 거짓으로 드러나면서 분노가 쌓였고, 4월 정부가 개헌 논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자 뚜껑이 열립니다. 6월 9일 시위 중 최루탄에 맞은 연세대생 이한열이 쓰러지는 사진이 결정적이었습니다. 6월 10일부터 전국의 거리가 찼고, 이번에는 학생만이 아니라 넥타이를 맨 직장인과 상인이 함께였습니다. 결국 6월 29일 직선제 수용 선언이 나오고 10월 개헌이 이루어집니다. 곧이어 7월부터 노동자 대투쟁이 이어지며 노동조합이 폭발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정치적 민주화가 작업장의 민주화 요구로 번진 것이죠. 그해 12월 대선에서 야권이 분열해 여당 후보가 당선되면서, 광장이 열어젖힌 문을 누가 통과할 것인가라는 숙제가 그대로 남습니다. 다음 강에서 이어집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1960년 4.19 혁명의 직접적 계기로 옳은 것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하던 마산 시위 과정에서 실종된 김주열 학생이 시신으로 발견되며 분노가 전국으로 번졌고, 4월 19일 대규모 시위로 이어져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습니다. 유신은 1972년, 한일협정은 1965년의 일이고, 직선제 요구는 1987년 6월 항쟁의 구호입니다.
문제 2. 1970년 전태일의 죽음이 드러낸 문제의 핵심은?
전태일이 안고 있던 것은 근로기준법 책이었고 그의 외침은 법을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존재하는 법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문제의 핵심이었죠. 수출은 오히려 빠르게 늘던 시기였고, 이 사건은 성장의 그늘을 사회 의제로 끌어올렸습니다.
문제 3. 1972년 유신헌법의 내용으로 옳은 것은?
유신헌법은 대통령 선출을 간접선거로 바꾸고 임기 제한을 없앴으며, 국회의원 상당수를 대통령이 사실상 지명하고 긴급조치로 기본권을 정지시킬 수 있게 했습니다. 선거를 통한 정권 교체 경로 자체가 닫힌 것이죠. 그래서 저항이 제도 바깥의 항쟁으로 나타났습니다.
문제 4.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정확한 것은?
1980년 5월 비상계엄 확대와 공수부대 투입에 맞선 시민 항쟁이었고, 오랫동안 폭동으로 불리다가 1995년 특별법과 1997년 국가기념일 지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행방불명자를 포함한 전체 희생 규모는 지금도 조사가 이어지고 있어 당시 발표로 확정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압축 성장의 성과와 그 과정에서 치른 대가는 하나의 저울에 함께 올려놓고 평가할 수 있을까요?
  • 1987년의 광장은 무엇을 얻었고, 무엇을 다음 세대의 숙제로 남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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