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와 고대 3강. 삼국: 5세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삼국의 전성기는 겹치지 않았습니다. 4세기 백제, 5세기 고구려, 6세기 신라. 그리고 판정 기준은 하나, 한강이었습니다.
풀고 시작
릴레이의 첫 주자, 4세기의 백제
한군현의 간섭이 약해진 자리에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차례로 고대 국가의 꼴을 갖춥니다. 먼저 치고 나간 것은 뜻밖에도 가장 늦게 이름을 알린 백제였습니다. 한강 하류의 비옥한 땅과 서해 항로를 쥔 백제는 4세기 근초고왕 때 전성기를 맞습니다. 371년 근초고왕은 평양성을 공격해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왕이 전장에서 죽는 것, 고대 국가로서는 최악의 굴욕입니다. 이 시기 백제는 마한 세력을 병합하고 중국 동진, 왜와 활발히 교류하며 해상 네트워크의 중심에 섰습니다.
고구려는 이 굴욕을 잊지 않았습니다. 소수림왕이 불교 수용, 태학 설립, 율령 반포로 내부를 재정비했고, 이 개혁이 다음 세기의 도약대가 됩니다. 복수는 준비된 자의 것이었죠.
5세기, 고구려의 시간
391년 즉위한 광개토왕은 이름 그대로 영토를 넓힌 왕입니다. 백제를 몰아붙여 한강 이북을 장악하고, 신라에 침입한 왜를 격퇴하러 보병과 기병 5만을 남쪽으로 보냈습니다. 신라를 구해준 대가로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영향권에 들어갑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이름값을 하듯 79년을 재위하며 아버지의 정복을 체제로 굳혔습니다. 427년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것이 신호탄입니다. 평양 천도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남진 정책의 선언이었죠.
475년 장수왕은 백제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입니다. 100년 전 고국원왕의 전사를 정확히 되갚은 셈입니다.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쫓겨 내려갔습니다. 이 시기 고구려가 어떤 나라였는지는 광개토왕릉비와 충주 고구려비가 증언합니다. 비문은 고구려가 스스로를 천하의 중심으로 여기는 독자적 세계관을 가졌음을 보여줍니다. 5세기의 주인공은 의심할 여지 없이 고구려였습니다.
6세기, 막차를 탄 신라의 역전
가장 늦게 출발한 신라는 6세기에 몰아칩니다. 지증왕이 국호를 신라로 확정하고, 법흥왕이 율령 반포와 불교 공인으로 체제를 갖춘 뒤, 진흥왕이 정복 군주로 등장합니다. 551년 신라는 백제 성왕과 손잡고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빼앗았습니다. 여기까지는 아름다운 동맹이었죠. 그런데 553년 진흥왕은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를 기습해 빼앗아버립니다. 격분한 성왕은 이듬해 관산성을 공격하다 전사합니다. 120년을 이어온 나제 동맹은 이렇게 배신으로 끝났습니다.
왜 하필 한강이었을까요. 한강 유역은 한반도 최대의 곡창이자 인구 밀집지이며, 무엇보다 서해를 통해 중국과 직접 통하는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삼국의 전성기는 정확히 한강을 쥔 시기와 일치합니다. 4세기 백제, 5세기 고구려, 6세기 신라. 한강 확보 후 신라는 당항성을 통해 중국과 직접 교섭하기 시작했고, 이 외교 라인이 다음 강에서 볼 삼국 통일의 결정적 무기가 됩니다. 진흥왕은 정복지마다 순수비를 세웠는데, 북한산비와 마운령비 등이 지금도 남아 그의 진군 경로를 증언합니다.
잊힌 네 번째 나라, 가야
삼국 시대라는 이름에 가려진 나라가 있습니다. 낙동강 하류의 가야 연맹입니다. 김해의 금관가야는 질 좋은 철을 생산해 낙랑과 왜를 잇는 철 무역으로 번성했고, 고령의 대가야가 후기 연맹을 이끌었습니다. 가야 고분에서 쏟아진 철제 갑옷과 금동관은 이 나라가 결코 변방이 아니었음을 보여주죠. 다만 가야는 끝내 중앙 집권 국가로 나아가지 못한 채 금관가야가 532년, 대가야가 562년 신라에 병합됩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삼국 시대 대신 사국 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직 소수 견해이지만, 승자가 쓴 구도인 삼국이라는 틀 자체를 의심해보게 만드는 유익한 논쟁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553년 진흥왕의 배신은 비난받아야 할 변절일까요, 국익을 따른 당연한 선택일까요? 국가 간 동맹에 도덕을 적용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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