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와 고대 1강. 한반도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 때
미군 병사가 데이트하다 주운 돌 하나가, 세계 고고학 교과서를 다시 쓰게 만들었습니다.
풀고 시작
데이트 중에 발견된 주먹도끼
1978년 봄, 주한미군 상병 그렉 보웬(Greg Bowen)이 한탄강 유원지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는 입대 전 애리조나 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한 사람이었죠. 강가에서 낯익은 모양의 돌을 집어 든 순간, 그는 이것이 교과서에서 본 아슐리안(Acheulean)형 주먹도끼와 닮았다는 것을 알아챘습니다. 그가 프랑스의 저명한 구석기 학자에게 편지를 보냈고, 연락은 서울대 김원용 교수에게 닿았습니다. 그렇게 연천 전곡리 유적 발굴이 시작됩니다.
왜 이것이 사건이었을까요. 당시 세계 고고학계에는 모비우스 라인(Movius Line)이라는 학설이 있었습니다. 인도 동쪽의 동아시아에서는 정교한 양면 가공의 아슐리안 주먹도끼가 발견되지 않으니, 이 지역은 단순한 찍개 문화에 머물렀다는 구분선입니다. 전곡리의 주먹도끼는 바로 그 "없다"를 무너뜨린 실물 반례였습니다. 학설 하나가 유원지의 돌멩이 하나로 흔들린 셈이죠. 이후 전곡리에서는 수천 점의 석기가 나왔고, 이 유적은 세계 구석기 지도에서 동아시아를 다시 그리게 만들었습니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살며 이동 생활을 했습니다. 한반도에는 약 7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공주 석장리, 단양 수양개 같은 유적이 그 흔적입니다.
토기에 새겨진 정착의 증거
기원전 8000년 무렵부터 한반도는 신석기 시대로 들어섭니다. 이 시대의 아이콘이 빗살무늬토기입니다. 서울 암사동 유적에서 대량으로 나온, 겉면에 빗금을 촘촘히 새긴 뾰족바닥 토기죠. 그런데 토기가 왜 혁명의 증거일까요. 토기는 무겁고 깨지기 쉽습니다. 매일 이동하는 사람은 토기를 만들지 않습니다. 토기의 존재 자체가 정착 생활의 증거인 것입니다.
정착을 가능하게 한 것은 농경입니다. 신석기인들은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을 재배하기 시작했고, 강가에 움집을 짓고 마을을 이뤘습니다. 다만 농경이 시작됐다고 사냥과 어로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암사동이 한강변에 있는 이유이기도 하죠. 이 시대까지는 아직 뚜렷한 신분 차이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균형이 깨지는 것이 다음 시대입니다.
고인돌이 말해주는 것: 불평등의 탄생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 무렵 청동기 시대가 열립니다. 벼농사가 본격화되고, 비파형 동검 같은 청동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 시대의 가장 압도적인 유물은 청동이 아니라 돌입니다. 고인돌(지석묘)이죠. 한반도에는 약 4만 기의 고인돌이 남아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밀집된 분포로,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수십 톤짜리 덮개돌을 옮기려면 수백 명의 노동력이 필요합니다. 그 노동력을 한 사람의 무덤을 위해 동원할 수 있었다는 것, 이것이 핵심입니다. 고인돌은 계급의 발생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농경으로 잉여 생산물이 생기자 그것을 더 많이 가진 자가 나타났고, 청동 무기를 독점한 족장이 지배자가 됐습니다. 평등했던 마을이 계급 사회로, 계급 사회가 국가로 나아가는 문턱에 선 것입니다. 그 문턱을 처음 넘은 나라가 고조선이고, 다음 강의 주인공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 불평등은 필연일까요, 아니면 분배 방식에 따라 피할 수 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