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1강. 삼전도의 굴욕과 그 후
임금이 적장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조선 후기는 이 장면을 어떻게 소화할 것인가의 역사입니다.
풀고 시작
줄타기 외교와 그 대가
임진왜란이 끝난 뒤 동아시아의 판이 흔들립니다. 명은 전쟁 후유증으로 기울고, 만주에서는 누르하치의 후금이 무섭게 일어섭니다. 이 틈에서 광해군은 위험한 줄타기를 선택합니다. 1619년 명이 후금 토벌군 파병을 요구하자 강홍립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되, 전세를 보아 무리하지 말라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군이 대패하자 강홍립은 후금에 투항했고, 조선은 파국을 피했습니다.
그런데 1623년, 서인 세력이 광해군을 몰아냅니다. 인조반정입니다. 명분은 두 가지였습니다. 어머니(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영창대군)을 죽인 패륜, 그리고 명의 은혜를 저버린 외교였죠. 광해군 평가는 지금도 논쟁적입니다. 실리 외교의 선구자로 재평가하는 시각이 널리 퍼졌지만, 무리한 궁궐 공사와 옥사로 통치 기반을 스스로 무너뜨린 군주였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두 번의 호란, 그리고 삼전도
반정으로 들어선 인조 정권은 친명배금을 내걸었습니다. 후금이 이를 두고 보지 않았죠. 1627년 정묘호란으로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습니다. 1636년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군신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척화론으로 들끓었고, 그해 겨울 청 태종이 직접 침입합니다. 병자호란입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고립됩니다. 한겨울 47일, 성 안에서는 싸우자는 척화파(김상헌)와 살아남자는 주화파(최명길)가 맞섰습니다. 최명길이 항복 문서를 쓰면 김상헌이 찢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입니다. 결국 1637년 1월,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합니다. 조선 왕조 최대의 굴욕이었습니다.
소현세자라는 갈림길
항복 조건으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심양에 인질로 끌려갑니다. 그런데 소현세자는 그곳에서 뜻밖의 경험을 합니다. 청의 실력을 목격하고, 북경에서 선교사 아담 샬을 만나 서양 과학과 문물을 접한 것입니다. 1645년 귀국한 세자는 두 달 만에 급사합니다. 실록은 시신이 검게 변했다고 기록했고 독살설이 퍼졌지만, 사인은 지금도 확정할 수 없는 논쟁거리입니다. 확실한 것은 결과입니다. 청의 현실을 인정하고 새 문물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던 길 하나가 닫혔다는 사실이죠.
북벌론의 이념과 현실
동생 봉림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효종입니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과 함께 청을 정벌해 치욕을 씻겠다는 북벌론을 내걸고 군비를 정비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전성기의 청을 칠 국력은 없었고, 정비된 군사력이 실제로 쓰인 것은 오히려 청의 요청에 따른 두 차례 나선 정벌(러시아와의 충돌)이었습니다. 북벌은 실행된 계획이라기보다, 패배한 나라의 자존심을 지탱하고 집권 세력의 결속을 다지는 이념으로 기능했다는 평가가 유력합니다. 이 "청은 오랑캐"라는 인식이 뒤집히는 순간, 즉 청을 배우자는 북학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3강에서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