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3강. 사화: 선비들은 왜 죽어야 했나
네 번의 피바람에서 사림은 계속 졌습니다. 그런데 70년 뒤 조정을 채운 쪽은 사림이었습니다.
풀고 시작
공신들의 나라에 들어온 이방인
조선 전기 정치의 판을 쥔 쪽은 훈구(勳舊)였습니다. 1453년 계유정난과 세조 즉위에 공을 세워 공신 책봉을 받은 이들과 그 후손이죠. 공신전과 노비를 대대로 물려받으며 중앙 관직을 나눠 가진, 말하자면 지분을 가진 주주 집단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너무 오래 이겼다는 데 있습니다. 성종은 이 구조가 왕권에도 위협이 된다고 보고, 지방에서 학문을 닦던 세력을 불러들입니다. 고려 말 정몽주와 길재의 학맥을 잇는다고 자부한 사림(士林)이었습니다. 성종은 이들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에 배치했습니다. 삼사는 관리를 탄핵하고 왕의 잘못을 따지는 언론 기관입니다. 즉 사림은 재산도 병력도 없이 말할 권리 하나를 쥐고 판에 들어온 셈입니다. 그리고 그 말이 향한 곳은 훈구의 부패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짚고 가겠습니다. 훈구와 사림을 성분이 전혀 다른 두 진영으로 딱 잘라 나누는 이 구도는 교과서가 정리해 준 지도일 뿐입니다. 최근 연구에서는 두 집단의 출신 지역이나 경제 기반이 생각만큼 갈리지 않았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도 사화 네 건의 전개를 따라가는 데는 이 지도가 여전히 쓸모가 있으니, 경계선은 흐릿하다는 점만 기억한 채 빌려 쓰겠습니다.
사초에서 시작된 첫 번째 피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균형은 무너집니다. 1498년, 성종실록을 만들던 실록청에서 김일손이 남긴 사초가 문제가 됩니다. 그 안에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실려 있었죠.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를 애도한 글인데, 이를 단종과 세조에 빗댄 것이라고 훈구 측이 해석해 올렸습니다. 세조의 정통성을 건드린 셈이니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김일손은 처형되고 이미 죽은 김종직은 무덤에서 꺼내져 부관참시를 당합니다. 이것이 무오사화입니다. 그런데 6년 뒤인 1504년의 갑자사화는 성격이 다릅니다. 연산군이 생모 폐비 윤씨의 사사 경위를 알게 되면서 벌어진 보복으로, 이번에는 훈구 대신들까지 대거 화를 입었습니다. 사림과 훈구의 대립이라기보다 왕 개인의 폭주에 가까웠고, 결국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은 쫓겨납니다.
4년 만에 무너진 개혁
반정으로 왕이 된 중종은 자신을 세운 반정공신들에게 눌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꺼낸 카드가 조광조였습니다. 1515년 등용된 그는 3년 만인 1518년에 대사헌에 올라 개혁을 몰아칩니다. 도교 제사를 맡던 소격서를 없애고, 학문과 덕행으로 인재를 천거해 뽑는 현량과를 시행하고, 향촌 자치 규약인 향약을 보급했습니다. 그러나 결정타는 1519년의 위훈 삭제였습니다. 반정공신 가운데 공이 없이 이름을 올린 자들의 자격을 박탈하자는 요구였고, 실제로 상당수가 명단에서 지워집니다. 공신들의 재산과 지위가 걸린 문제였으니 반격은 시간문제였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 야사의 기록이라 사실 여부는 논쟁적입니다. 분명한 것은 중종이 등을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조광조는 유배 끝에 사사되고, 기묘사화로 개혁은 끝납니다.
외척들이 휘두른 마지막 칼
1545년의 을사사화는 앞의 셋과 결이 또 다릅니다.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뜨고 어린 명종이 오르자,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윤원형)이 충돌합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을 등에 업은 소윤이 대윤을 역모로 몰아 제거했고, 대윤과 가까웠던 사림도 함께 쓸려 나갔습니다. 사림이 사화의 표적이 된 것은 맞지만, 이 사건의 본질은 왕실 외척 간의 권력 다툼이었습니다. 이렇게 50년 사이 네 번, 사림은 번번이 패배합니다.
진 쪽이 최종적으로 이긴 이유
그럼에도 선조가 즉위한 1567년 이후 조정은 사림의 것이 됩니다. 이유는 이들이 중앙에서 지는 동안 지방에 다른 기반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1543년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은 1550년 이황의 건의로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으며 국가 공인 교육기관이 됩니다. 서원은 학문과 제사와 인맥을 한자리에 묶었고, 향약은 향촌의 질서 자체를 사림의 규범으로 바꿨습니다. 중앙에서 죽어도 지방에서 재생산되는 구조였죠. 다만 승리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사림은 서로를 겨눕니다. 1575년 이조 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김효원과 심의겸이 대립하며 동인과 서인이 갈리고, 붕당 정치가 시작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조광조는 4년 만에 개혁을 밀어붙이다 무너졌습니다. 속도가 문제였을까요, 아니면 위훈 삭제라는 표적이 문제였을까요. 더 천천히 갔다면 결과가 달랐을지 따져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