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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2강. 임시정부와 무장투쟁의 사람들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세운 것은 왕조가 아니라 공화국이었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반포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 제1조에서 밝힌 국가 형태는?
임시헌장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었습니다. 대한제국이 무너진 지 9년 만에 주권이 황제가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고 못 박은 것이죠. 위임통치 구상은 이승만 개인의 외교 방안으로 뒤에 큰 논란이 되었을 뿐, 국가 형태 규정이 아니었습니다.

황제가 사라진 자리에 국민이 앉다

3.1운동의 열기가 채 식기 전, 임시정부가 한 곳도 아니고 세 곳이나 생깁니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서울에서 선포된 한성정부, 그리고 상하이의 임시정부였습니다. 독립을 외치는 목소리가 갈라져 있으면 힘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에 따라 1919년 9월 이들은 상하이에서 하나로 통합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발이었습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정부의 형태입니다. 불과 9년 전까지 이 땅은 황제의 나라였는데, 새 정부는 민주공화제를 택했습니다. 임시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가 앉았고, 입법 기구인 임시의정원이 따로 있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국내와 연결되는 비밀 행정망인 연통제와 통신 조직인 교통국을 운영했고, 『독립신문』을 펴냈으며, 파리강화회의에 가 있던 김규식을 전권대사로 임명해 외교를 맡겼습니다. 다만 1920년대 들어 일제의 검거로 연통제와 교통국이 잇달아 무너지면서 국내와의 연결선은 크게 약해집니다.

총성으로 답한 사람들

만주와 연해주에서는 다른 방식의 답이 나왔습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부대가 두만강 건너 봉오동에서 추격해 온 일본군을 골짜기로 끌어들여 크게 이겼습니다. 그해 10월에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부대 등이 백운평과 어랑촌 일대에서 엿새 동안 싸운 청산리 전투가 벌어집니다. 독립군 무장투쟁사에서 가장 큰 승리로 기록되죠.

그런데 이야기는 승전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본군은 보복으로 간도의 한인 마을을 습격해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간도참변입니다. 근거지를 잃고 러시아령으로 이동한 독립군 부대들은 1921년 지휘권을 둘러싼 분쟁과 러시아 적군의 무장해제 요구가 겹치면서 자유시 참변을 겪습니다. 희생 규모는 자료마다 차이가 커서 지금도 연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장투쟁은 낭만이 아니라 국경과 국제 정세에 목숨을 건 일이었습니다.

흩어진 부대들은 만주에서 참의부와 정의부, 신민부라는 세 자치 조직으로 다시 모여 동포 사회를 관리하며 군사 활동을 이어 갔습니다. 그러자 총독부는 1925년 만주 군벌과 미쓰야 협정을 맺어, 독립군을 단속하고 붙잡힌 사람을 넘겨받기로 합의합니다. 무장 세력을 국경 밖에서 조여 오는 방식이었죠.

폭탄을 든 젊은이들

정규전이 어려워지자 소수 정예의 의열 투쟁이 떠오릅니다. 1919년 11월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된 의열단은 총독부, 경찰서, 식민 경제기관을 직접 겨냥했습니다. 이들의 지침서가 신채호가 1923년에 쓴 「조선혁명선언」이었습니다. 외교와 준비론을 비판하고 민중의 직접 혁명을 내세운 문서였죠. 김익상은 조선총독부에, 김상옥은 종로경찰서에, 나석주는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습니다.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의 활로를 연 것도 이 방식이었습니다. 1931년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에서, 이봉창은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왕의 행렬에 폭탄을 던졌고, 윤봉길은 그해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 겸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식장에서 거사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국민당 정부가 임시정부를 본격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대신 일제의 추적이 거세져 임시정부는 이후 오랜 이동의 시기를 보내게 됩니다.

하나가 되지 못한 노선들

독립운동은 한목소리가 아니었습니다. 국제 여론에 호소하자는 외교론, 총을 들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 교육과 산업으로 힘부터 기르자는 실력양성론이 팽팽했습니다. 각자 나름의 근거가 있었기에 더 어려운 갈등이었죠.

결국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열립니다. 임시정부를 없애고 새로 만들자는 창조파와, 조직을 고쳐 쓰자는 개조파가 맞섰고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1925년에는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직에서 탄핵되었고, 이후 임시정부는 국무령제를 거쳐 여러 사람이 함께 이끄는 국무위원제로 바뀌며 김구를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갑니다. 무장의 힘이 약해진 자리에서 사람들이 붙든 또 하나의 전선이 있었습니다. 말과 글, 그리고 역사였습니다. 다음 강의 주제입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1919년 9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통합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택했고 임시의정원이라는 입법 기구를 두었으며, 국내와의 연결을 위해 비밀 행정망인 연통제와 통신 조직 교통국을 운영했습니다. 본부는 상하이였고, 어느 국제기구의 정부 승인도 받지 못했습니다.
문제 2.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이후에 벌어진 일로 옳은 것은?
두 차례 승리 뒤 일본군은 간도의 한인 마을을 습격해 민간인을 학살했고, 근거지를 잃은 부대들은 러시아령으로 이동했다가 1921년 지휘권 분쟁과 무장해제 요구가 겹치는 속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었습니다. 승전 이후가 오히려 더 혹독했던 것이죠.
문제 3. 의열단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의열단은 1919년 만주 지린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결성되었고, 1923년 신채호가 쓴 조선혁명선언이 그 논리를 대변했습니다. 1931년 김구가 만든 한인애국단은 별개 조직이며, 이봉창과 윤봉길은 한인애국단 소속입니다.
문제 4.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의 진로를 놓고 창조파와 개조파가 대립했고 회의는 성과 없이 끝났습니다. 오히려 1925년에 이승만이 탄핵되었고, 좌우 합작 시도는 1927년 국내에서 신간회로 나타납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외교와 무장투쟁과 실력양성 가운데 하나만 옳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셋이 갈라진 것 자체가 식민지라는 조건의 결과였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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