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4강. 코리아라는 이름을 만든 문화
세계가 우리를 부르는 이름은 조선도 대한도 아닌 고려에서 나왔습니다. 그 이름을 실어 나른 것은 군대가 아니라 배와 그릇과 활자였습니다.
풀고 시작
세상에 없던 푸른색
1123년 송나라 사신 서긍이 고려에 한 달 남짓 머물고 돌아가 『고려도경』을 씁니다. 그 안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도자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 사람들은 비색이라 부른다는 것입니다. 도자기 종주국에서 온 관리가 남의 나라 그릇 색깔에 이름까지 적어둔 셈이니, 당시 고려청자의 평판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려청자의 승부처는 흙과 불이었습니다. 철분이 미량 든 유약을 발라 1200도가 넘는 환원 불꽃에서 구우면 특유의 맑은 청록빛이 나오는데, 이 온도와 산소량을 안정적으로 잡아내는 것이 기술의 핵심이었습니다. 12세기 중엽에는 여기에 고려가 독자적으로 꽃피운 기법이 얹힙니다. 표면을 파내고 백토와 자토를 메워 구워내는 상감 기법입니다. 상감 자체는 금속공예와 나전칠기에서 쓰던 방식이었는데, 이것을 청자에 본격적으로 옮겨 온 사례는 고려 밖에서 찾기 어렵습니다. 중국 청자가 색과 형태의 완성도로 승부했다면, 고려는 그 위에 구름과 학과 버드나무를 그려 넣은 것이죠. 강진 사당리와 부안 유천리 일대의 가마터가 이 시기 최고급 청자를 왕실에 대던 생산 기지였습니다.
구텐베르크보다 78년 앞선 활자
앞 강에서 본 팔만대장경은 목판 인쇄의 정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목판에는 치명적 약점이 있습니다. 책 한 종을 찍으려면 그 책만을 위한 판을 통째로 새겨야 하죠. 종류는 적고 부수는 많은 책에는 유리하지만, 종류가 많고 부수가 적은 책에는 재앙입니다. 고려의 해법이 금속활자였습니다. 글자를 하나씩 주조해 두고 필요한 대로 조판했다가 흩어서 다시 쓰는 방식입니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는 1234년 무렵 강화도에서 『상정고금예문』 28부를 주자, 곧 금속활자로 찍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다만 실물이 전하지 않아 현존 최고 금속활자본의 자리는 1377년 청주 흥덕사에서 간행된 직지심체요절에 돌아갔습니다. 이 책은 구한말 초대 주한 프랑스 공사 콜랭 드 플랑시가 수집해 프랑스로 건너갔고, 몇 사람의 소장자를 거쳐 1950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들어간 뒤 오랫동안 잊혔습니다. 그러다 1972년 파리에서 일하던 박병선 박사가 이 책의 가치를 밝혀내면서 세계에 알려졌죠. 지금도 그곳에 있고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습니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가 1455년경이니 78년 앞선 것입니다. 다만 정직하게 덧붙이면, 유럽의 활자는 대량 인쇄와 종교개혁으로 이어진 반면 고려의 활자는 소량 관찬 출판에 머물렀습니다. 발명의 선후와 사회적 파급력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이 이 비교의 진짜 교훈입니다.
벽란도, 예성강 하구의 국제항
개경에서 서쪽으로 30여 리, 예성강이 바다와 만나는 자리에 벽란도가 있었습니다. 조수를 타면 큰 배가 곧장 수도 코앞까지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이라, 이곳은 고려의 관문이자 동아시아 무역의 중계 지점이 됩니다. 송나라 상인이 비단과 서적과 약재를 싣고 왔고 고려는 인삼과 나전칠기와 종이를 내보냈습니다. 일본 상인은 유황과 수은을 가져왔고, 거란과 여진은 말과 모피를 팔았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손님은 더 멀리서 왔습니다. 『고려사』에는 1024년과 1025년, 그리고 1040년에 대식국 상인들이 수은과 향료를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대식국은 아라비아를 가리킵니다. 이들이 오간 통로를 따라 고려라는 국호가 서방에 전해졌고, 그것이 오늘날 Korea의 뿌리가 되었다고 흔히 설명됩니다. 매년 11월 개경에서 열린 팔관회는 이 모든 손님이 한자리에 모이는 장이었습니다. 종교 행사이면서 동시에 국가가 주관하는 국제 교역의 무대였던 셈이죠.
갈라진 불교를 꿰맨 두 승려
고려는 불교의 나라였지만, 그 불교는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경전 연구를 중시하는 교종과 참선을 앞세우는 선종이 오래 갈라져 있었고, 그 대립은 종종 정치 세력의 대립이기도 했습니다. 이를 봉합하려 한 첫 시도가 문종의 넷째 아들 의천입니다. 왕자 신분으로 출가해 송에 다녀온 그는 천태종을 열고, 교리 공부와 참선 수행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교관겸수를 내세웁니다. 동아시아 각국의 불교 주석서를 모아 목록을 만들고 간행한 작업도 그의 몫이었죠. 다만 왕실의 후원에 크게 기댄 통합이었던 탓에 그가 세상을 떠난 뒤 힘을 잃습니다.
두 번째 시도는 무신정권기의 지눌이 이어받습니다. 그는 개경의 권력화된 불교를 떠나 지금의 순천 송광사 자리에서 수선사 결사를 일으키고, 승려들에게 노동하고 수행하며 스스로를 닦자고 호소했습니다. 사상적으로는 선을 중심에 두고 교를 껴안는 정혜쌍수, 그리고 단번에 깨친 뒤에도 꾸준히 닦아야 한다는 돈오점수를 제시합니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주류인 조계종이 지눌에게서 사상의 뼈대를 얻었습니다. 이 개혁 불교의 시대가 저물고 성리학을 든 신진 사대부가 등장하면서, 고려의 다음 장이 열립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금속활자를 78년 먼저 만들고도 인쇄 혁명은 유럽에서 일어났습니다. 기술의 발명과 확산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