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2강. 영조와 정조: 개혁 군주의 시대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였습니다. 그 아들의 아들이 조선 최고의 개혁 군주가 됩니다.
풀고 시작
환국, 정치가 살육이 되다
숙종 대의 정치를 한 단어로 줄이면 환국입니다. 왕이 집권 붕당을 하루아침에 통째로 갈아치우는 방식이죠.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을 거치며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몰락했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상대 당의 영수가 사약을 받았습니다. 송시열도, 남인의 영수들도 그렇게 죽었습니다. 정치적 패배가 곧 죽음이 되자, 각 당은 상대를 공존의 대상이 아니라 절멸시켜야 할 원수로 보게 됩니다. 이 악순환을 물려받은 왕이 영조였습니다.
영조 자신이 당쟁의 피해자였습니다. 경종 대에 왕세제였던 그는 노론과 소론의 싸움 한복판에서 목숨을 위협받으며 즉위했죠. 그래서 영조는 탕평책을 국시로 내겁니다. 각 당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고, 1742년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편당 짓지 말라고 새겼습니다. 이조전랑의 권한을 축소해 당쟁의 발화점을 제거하고, 균역법으로 군포 부담을 절반으로 줄이는 민생 개혁도 폈습니다.
뒤주 속의 여드레, 임오화변
그런 영조가 1762년, 자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입니다. 임오화변입니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을 맡으며 아버지의 기대와 질책 속에 무너져 갔습니다. 혜경궁 홍씨의 기록 『한중록』은 세자가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하는 강박과 발작적 폭력에 시달렸다고 전합니다. 세자의 비행이 보고되자 영조는 세자에게 자결을 명했고, 거부하자 뒤주에 가두었습니다. 세자는 여드레 만에 죽었습니다. 이 사건의 원인을 두고 세자의 광증을 강조하는 해석과 노론·소론 당쟁 구도 속 정치적 희생을 강조하는 해석이 지금도 맞서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 비극이 다음 왕의 평생을 규정했다는 점입니다.
죄인의 아들, 왕이 되다
1776년 즉위한 정조의 첫마디는 유명합니다.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죽인 구도 위에서 왕이 된 그는, 복수 대신 판을 새로 짜는 길을 택합니다. 즉위하자마자 규장각을 세워 왕실 도서관이자 정책 연구소로 키우고, 초계문신제로 젊은 인재를 직접 길렀습니다. 서얼 출신 박제가, 유득공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발탁한 것도 파격이었죠. 친위 부대 장용영으로 군사 기반을 다지고, 1791년 신해통공으로 시전 상인의 독점권(금난전권)을 크게 풀어 상업의 숨통을 틔웠습니다.
절정은 수원 화성입니다. 아버지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고 그 곁에 신도시를 건설했죠. 설계에 참여한 젊은 정약용은 도르래 원리를 응용한 거중기를 고안해 공사 비용과 기간을 크게 줄였습니다. 화성은 단순한 성곽이 아니라 정조가 구상한 새 정치의 무대였습니다.
1800년, 급반전의 복선
그런데 1800년, 정조가 49세로 갑자기 죽습니다. 열한 살 순조가 즉위하자 정조와 대립하던 노론 벽파의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했고, 이듬해 천주교 박해(신유박해)를 명분으로 정조의 사람들이 제거됩니다. 정약용은 18년 유배길에 오르죠. 왕 한 사람의 역량에 기댄 개혁은 왕의 죽음과 함께 무너졌고, 권력은 특정 가문의 손으로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그 어두운 60년, 세도정치는 4강에서 다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