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개항기 1강. 강화도조약: 불평등하게 열린 문
조선 최초의 근대 조약은, 조약이 무엇인지 아는 쪽과 모르는 쪽이 마주 앉아 맺은 조약이었습니다.
풀고 시작
22년 전에 당한 방식 그대로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 초지진 앞바다에 나타납니다. 허락 없이 연안을 측량하며 접근하자 조선 수비대가 포격했고, 운요호는 기다렸다는 듯 초지진을 함포로 부수고 영종도에 상륙해 살육과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평화로운 우리 배가 공격당했다"며 책임을 물었죠. 이 각본,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으신가요. 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에 굴복해 강제로 개항당했던 일본이, 딱 22년 만에 자신이 당한 포함외교(gunboat diplomacy)를 조선에 그대로 재연한 것입니다. 이듬해인 1876년 2월, 조선은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 이른바 강화도조약에 서명합니다.
조약문을 뜯어보면
제1관은 뜻밖에도 "조선은 자주국"이라고 선언합니다. 듣기 좋은 말 같지만, 실은 청의 종주권을 조선 문제에서 배제해 두려는 일본의 포석이었습니다. 조선이 자주국이어야 나중에 청이 끼어들 명분이 없어지니까요. 제7관은 일본이 조선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할 수 있게 했습니다. 해안 측량 지도는 곧 군사 침공의 기초 자료입니다. 제10관이 앞서 본 영사재판권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몇 달 뒤 맺은 부속 조약(조일수호조규부록과 조일무역규칙)은 개항장에서 일본 화폐 유통을 허용하고, 수출입 상품에 관세를 한 푼도 매기지 못하게 했으며, 양곡의 무제한 유출을 열어 두었습니다. 국경의 문만 연 것이 아니라 문지기의 무기까지 내준 셈입니다.
개항장의 풍경
부산(1876)을 시작으로 원산(1880), 인천(1883)이 차례로 열렸습니다. 개항장에는 일본인 거류지가 들어서고, 일본 상인들은 영국산 면직물을 싸게 팔고 조선 쌀을 사 갔습니다. 이른바 미면 교환 체제입니다. 쌀이 개항장으로 빨려 나가자 곡가가 뛰었고, 그 부담은 고스란히 도시 빈민과 농민에게 떨어졌습니다. 개항의 이익과 고통이 계층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배분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불만은 뒤에 임오군란과 동학농민운동이라는 형태로 폭발하게 됩니다.
도끼를 메고 온 유학자
조약 체결 소식에 유학자 최익현은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 엎드렸습니다. 내 목을 치든지 조약을 물리든지 하라는 지부복궐척화의소입니다. 그의 논리는 왜양일체론, 즉 지금의 일본은 옛 일본이 아니라 서양과 한 몸이 된 오랑캐라는 것이었죠. 이것이 위정척사 운동입니다. 반대편에는 개항과 서양 기술 수용이 불가피하다는 개화론이 서 있었습니다. 1880년 수신사 김홍집이 청 외교관 황준헌의 『조선책략』(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을 권한 책)을 들여오자, 1881년 이만손 등 영남 유생 만여 명이 영남만인소로 반발합니다. 그럼에도 조선은 1882년 미국과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었고, 이후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가 줄줄이 들어옵니다. 조선을 둘러싼 열강의 각축전, 그 판이 이때 깔린 것입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 판 위에서 벌어진 첫 폭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만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위정척사파의 개항 반대는 시대착오였을까요, 아니면 불평등 조약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은 경고였을까요. 두 해석 모두를 뒷받침하는 근거를 각각 들어 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