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3강. 조선이 스스로 바뀌던 시간
개혁 군주가 없어도 나라는 바뀌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 변화는 궁궐이 아니라 논과 장터에서 일어났습니다.
풀고 시작
세금 걷는 방식을 바꿨더니 시장이 생겼습니다
조선의 공납은 악명이 높았습니다. 고을마다 특산물을 현물로 바치게 했는데, 정작 그 고을에서 나지 않는 물건이 배정되는 일이 흔했죠. 그러면 방납업자가 대신 물건을 구해 바치고 몇 배의 값을 뜯어 갔습니다. 이 구조를 뒤집은 것이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이원익의 건의로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된 대동법입니다. 집이 아니라 땅을 기준으로, 현물이 아니라 쌀과 베와 돈으로 걷는 방식이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진 쪽의 부담이 커지니 반발도 거셌고, 전국으로 퍼지는 데 꼭 100년이 걸려 1708년 황해도까지 닿고서야 자리를 잡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도 계획하지 않은 일이 벌어집니다. 나라가 쌀로 세금을 받으면 궁궐에 필요한 물건은 누가 댈까요. 공인(貢人)이라는 어용 상인이 등장해 국가 돈으로 시장에서 물품을 사들였습니다. 왕실이 조선 최대의 고객이 된 것이죠. 이 수요를 타고 수공업자와 상인이 늘었고, 18세기에는 전국의 장시가 천 곳을 넘어 닷새마다 열리는 시장망으로 이어집니다.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동래의 내상처럼 사무역으로 큰돈을 쥔 상인과 한강 물길로 미곡 유통을 쥔 경강상인이 나타났고, 1678년 법화로 주조된 상평통보도 18세기에 들어 전국에서 돌기 시작합니다.
모를 옮겨 심자 사람이 남았습니다
비슷한 시기 논에서도 조용한 혁명이 일어납니다. 못자리에서 모를 길러 논에 옮겨 심는 이앙법(모내기법)입니다. 정부는 오랫동안 이것을 금지했습니다. 옮겨 심을 때 비가 오지 않으면 그해 농사를 통째로 날리기 때문이죠. 그런데 저수지와 보가 늘어 위험이 줄자 농민들은 금령을 무릅쓰고 이앙법을 택합니다. 잡초 뽑는 일손이 크게 줄고, 수확량이 늘고, 벼를 거둔 논에 보리를 심는 이모작까지 가능했으니까요.
일손이 남으면 무슨 일이 생길까요. 한 집이 훨씬 넓은 땅을 부치는 광작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조선 후기의 결정적 갈림길이 생깁니다. 광작에 성공한 농민은 담배와 인삼, 면화 같은 상품작물을 심어 부농으로 올라섰고, 지주가 땅을 거두어들이면서 소작지를 잃은 농민은 임노동자나 도시 빈민이 되었습니다. 같은 기술이 누구에게는 사다리였고 누구에게는 낭떠러지였던 셈입니다.
실학, 세 갈래의 처방전
나라가 이렇게 변하는데 학문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17세기 후반부터 현실 문제를 정면으로 붙드는 학풍이 나타납니다. 흔히 실학이라 부르는 흐름이고, 대체로 세 갈래로 정리합니다.
| 갈래 | 핵심 문제의식 | 대표 인물과 저작 |
|---|---|---|
| 중농(경세치용) | 토지 소유부터 다시 짜야 농민이 삽니다 | 유형원 반계수록, 이익 성호사설, 정약용 목민심서·경세유표 |
| 중상(이용후생·북학) | 상공업과 기술을 키워야 나라가 삽니다 | 유수원 우서, 홍대용 의산문답, 박지원 열하일기, 박제가 북학의 |
| 고증·국학 | 우리 역사와 땅을 실증으로 다시 씁니다 | 안정복 동사강목, 유득공 발해고, 김정희 금석과안록 |
중농 계열은 토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유형원은 신분에 따라 토지를 나누자는 균전론을, 이익은 한 집이 팔 수 없는 최소한의 땅(영업전)을 정해 두자는 한전론을 폈죠. 중상 계열은 정반대 지점을 짚습니다. 청에 다녀온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소비를 우물에 빗댑니다. 퍼내지 않는 우물은 말라 버리듯, 쓰지 않으면 만드는 기술도 죽는다는 것이죠. 홍대용은 한발 더 나아가 지구가 돈다는 지전설을 말하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관념 자체를 흔듭니다. 고증 계열의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신라와 발해를 함께 보는 남북국이라는 틀을 제안했고, 김정희는 북한산비를 직접 읽어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혀냅니다.
그런데 실학은 정말 하나였을까요
여기서 정직하게 짚을 것이 있습니다. 이들 중 누구도 자기를 "실학자"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실학을 하나의 사조로 묶어 부르는 방식은 20세기 전반 조선학 운동에서 이들을 재발견하며 자리 잡았고, 그래서 오늘날 학계에는 만만찮은 논쟁이 있습니다. 서로 만난 적도 없고 처방도 정반대인 이들을 한 학파로 묶는 것이 타당한가, 이들의 사고는 성리학과의 단절인가 아니면 성리학 내부의 개혁 시도인가, 이 흐름을 근대의 싹으로 읽는 것은 지나친 소급 해석이 아닌가 하는 질문들이죠. 분명한 사실은 이들의 구상 대부분이 실제 국정에 반영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상당수가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이나 서얼 출신이었고, 정약용은 18년을 유배지에서 보내며 저술했습니다. 조선 후기의 변화를 이끈 힘은 학자의 책보다 장터와 논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사실에 가깝습니다.
장터에 문화가 섰습니다
장터에 모인 것은 돈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모이면 이야기가 모이죠. 『홍길동전』을 필두로 한글소설이 쏟아졌고, 소설을 읽어 주는 직업 낭독가 전기수가 장터에 앉았으며,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생겼습니다. 광대 한 사람과 고수 한 사람이 몇 시간을 끌고 가는 판소리는 19세기에 신재효가 여러 마당의 사설을 정리하면서 형식을 갖춥니다. 탈춤은 양반을 대놓고 조롱했고, 김홍도는 씨름판과 서당을, 신윤복은 도시의 연애와 유흥을 그렸습니다. 이름 없는 화가들의 민화가 집집마다 걸린 것도 이때입니다. 문화의 주인공이 사대부에서 저잣거리 사람들로 옮겨 온 것이죠. 그런데 이 활기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정조가 죽은 뒤 권력이 몇몇 가문의 손에 넘어가면서 나라의 세금 체계 자체가 무너지기 시작하거든요. 그 60년을 다음 강에서 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같은 이앙법이 누구에게는 부농의 사다리가 되고 누구에게는 몰락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술 발전이 불평등을 키우는 이 구조는 오늘날 어떤 장면에서 반복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