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1강. 해방: 도둑같이 온 기쁨, 그어진 선
해방은 도둑같이 왔고, 분단선은 30분 만에 그어졌습니다. 기쁨과 비극이 같은 날 시작된 것입니다.
풀고 시작
도둑같이 온 해방
1945년 8월 15일 정오, 라디오에서 일왕의 항복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사상가 함석헌은 훗날 이 순간을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손으로 일본을 몰아낸 것이 아니라 연합국의 승리로 갑자기 찾아온 해방이었다는 뼈아픈 자각이죠. 여운형은 그날로 건국준비위원회를 꾸려 치안과 행정을 접수하기 시작했지만, 한반도의 운명을 쥔 것은 이미 외부의 힘이었습니다.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한 소련군이 북쪽으로 밀려 내려오자, 미국의 젊은 장교 딘 러스크와 찰스 본스틸은 벽에 걸린 지도를 보며 약 30분 만에 북위 38도선을 무장해제 경계로 제안합니다. 소련은 의외로 순순히 수락했고,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하면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점령군이 들어섰습니다.
신탁통치 파동: 좌우가 갈라서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이 만나 한반도 문제를 결정합니다. 핵심은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조선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최대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국내 언론이 이를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으로 보도하면서 여론이 폭발합니다. 실제로는 신탁통치 구상을 먼저 제안해 온 쪽이 미국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니, 사실과 어긋난 보도가 정국을 뒤흔든 셈입니다. 우익은 격렬한 반탁운동을 벌였고, 처음에 함께 반대하던 좌익은 "임시정부 수립이 먼저"라며 3상회의 결정 지지로 돌아섭니다. 같은 민족이 신탁 문제 하나로 찬탁과 반탁, 좌와 우로 완전히 갈라선 것입니다.
마지막 시도: 김구와 김규식, 38선을 넘다
갈라진 정국을 붙잡으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습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1946년부터 좌우합작운동을 이끌었지만,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1947년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동력을 잃습니다.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고, 유엔은 인구 비례 총선거를 결의했지만 소련이 북쪽 지역의 감시단 입북을 거부하면서 선거는 남쪽에서만 가능해졌습니다. 이때 김구는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단독정부 수립에는 협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1948년 4월 김규식과 함께 평양으로 가 남북협상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이미 남북 모두에서 별도의 정부 수립 준비가 진행 중이었고, 협상은 분단의 흐름을 되돌리지 못했습니다.
두 개의 정부, 그리고 책임 논쟁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 총선거가 치러지고,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됩니다. 북에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습니다. 해방 3년 만에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분단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을까요. 이 질문은 지금도 뜨거운 논쟁거리입니다. 냉전기의 전통주의 연구는 소련의 팽창과 좌익의 노선을 주된 원인으로 보았고, 브루스 커밍스로 대표되는 수정주의 연구는 미국의 점령 정책과 한반도 내부의 사회 갈등에 주목했습니다. 오늘날 학계는 어느 한쪽의 단독 책임이 아니라, 미소 냉전이라는 외부 요인과 좌우 대립이라는 내부 요인이 맞물린 복합적 결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합니다. 이 갈라진 두 정부는 2년 뒤 전쟁으로 충돌하게 됩니다. 다음 강의 이야기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만약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이 처음부터 정확하게 보도되었다면, 좌우 대립의 양상은 달라졌을까요?
- 김구의 남북협상은 실패가 예정된 낭만적 시도였을까요, 아니면 시도 자체로 의미 있는 선택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