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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3강. 말과 글을 지킨 사람들

사전을 만들던 학자들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일제는 낱말 모음을 독립운동으로 판단했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1920년대 일제의 이른바 문화통치를 가장 정확하게 설명한 것은?
문화통치는 통치 방식을 부드럽게 보이도록 바꾼 것이지 억압을 줄인 것이 아닙니다. 신문 발행을 허가하면서 검열과 정간으로 통제했고 경찰 인원과 예산은 크게 늘었습니다. 조선어 금지와 창씨개명은 1930년대 후반 전시체제기의 정책입니다.

허가받은 신문, 지워진 지면

3.1운동 이후 일제는 조선인의 불만을 관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조선말 신문이 다시 거리에 나왔습니다. 겉으로 보면 숨통이 트인 것 같았죠. 그런데 당시 신문 지면을 보면 기사 자리가 통째로 하얗게 비어 있거나 활자가 뭉개진 곳이 있습니다. 총독부 검열에서 삭제된 흔적입니다.

그럼에도 신문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냈습니다. 1930년대 초 『동아일보』는 학생들을 농촌으로 보내 한글을 가르치는 브나로드 운동을 벌였고, 『조선일보』도 문자보급운동을 이어 갔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일이 곧 사람을 깨우는 일이라고 본 것입니다. 총독부는 1934년 이 운동들을 금지합니다.

허가는 곧 관리의 다른 이름이었습니다. 신문은 압수와 정간을 반복해서 당했고,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를 지운 사진을 실은 『동아일보』는 장기 정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결국 두 신문은 1940년 폐간됩니다. 자유를 준 것이 아니라 자유의 범위를 총독부가 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 지식인들은 신문과 잡지, 학교와 학회처럼 합법의 틈새를 파고드는 방식으로 싸움을 이어 갑니다.

사전을 만든 죄

가장 조용하면서도 끈질겼던 싸움은 말과 글에서 벌어졌습니다. 1921년 결성된 조선어연구회는 1926년 훈민정음 반포를 기념하는 '가갸날'을 정했고, 1931년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꿉니다. 이들이 한 일은 언뜻 학술 작업처럼 보입니다.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발표하고 1936년 표준말을 정리한 뒤, 『조선말 큰사전』 편찬에 들어갔죠.

그러나 조선어를 없애려던 총독부의 눈에는 이것이 명백한 저항이었습니다. 1942년 일제는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대거 검거합니다. 조선어학회 사건입니다. 이윤재와 한징은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고 사전 원고는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반전은 해방 뒤에 왔습니다. 잃어버린 줄 알았던 원고 뭉치가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었고, 그 원고를 바탕으로 1947년부터 『조선말 큰사전』이 차례로 간행됩니다. 말을 지키는 일이 곧 나라를 지키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이보다 잘 보여주는 장면은 드뭅니다.

좌우가 손을 잡았던 4년

1927년에는 놀라운 조직이 등장합니다.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함께 만든 신간회입니다. 초대 회장은 이상재였고 전국에 지회를 두어 회원이 수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일제강점기 국내 최대 규모의 합법 항일 단체였죠.

신간회는 소작 쟁의와 노동 쟁의를 지원했고,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진상조사단을 보내고 대규모 민중대회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지도부가 검거되면서 계획은 무산되었고, 노선 갈등이 겹치며 1931년 스스로 해소를 결의합니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좌우가 공동의 적 앞에서 손을 잡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경험은 뒤에 해방 정국에서 다시 소환됩니다.

시와 역사로 버틴 사람들

문학과 학문도 전선이었습니다. 이육사는 독립운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고 「광야」와 「절정」을 남긴 뒤 1944년 베이징의 감옥에서 순국했습니다. 윤동주는 부끄러움을 응시하는 시들을 쓰다 유학 중 체포되어 1945년 2월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해방 뒤에야 나왔습니다.

역사학에서는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규정했고,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라며, 형체가 사라져도 정신이 살아 있으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썼습니다. 조선이 정체되어 있었다는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맞서 백남운은 사회경제사학의 방법으로 조선사도 보편적 발전 단계를 밟았다고 논증했습니다.

여기서 불편한 질문이 남습니다. 같은 시기 이광수와 최남선처럼 앞장서 협력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다만 전시체제로 갈수록 협력의 강요가 촘촘해졌기 때문에, 누가 어디까지 자발적이었는지를 두고는 지금도 평가가 갈립니다. 개인의 도덕만으로 재단하기보다 강요와 선택이 뒤섞인 구조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그 구조가 어디까지 갔는지는 다음 강에서 확인합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1920년대 민족 언론의 처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실은?
문화통치기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으나 검열로 지면이 비는 일이 잦았고 압수와 정간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전시체제로 접어든 1940년에는 두 신문 모두 폐간되었습니다. 허가가 곧 자유는 아니었던 것이죠.
문제 2. 조선어학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조선어연구회에서 이름을 바꾼 조선어학회는 1933년 맞춤법 통일안, 1936년 표준말 정리에 이어 큰사전 편찬에 나섰고, 1942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회원들이 검거되었습니다. 사라진 줄 알았던 원고가 해방 뒤 서울역 창고에서 발견되어 사전이 간행되었습니다.
문제 3. 신간회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신간회는 1927년 좌우 합작으로 결성되어 전국에 지회를 둔 최대 규모의 합법 단체였고,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때 진상조사단 파견과 민중대회를 추진했습니다. 지도부 검거와 내부 노선 갈등 끝에 1931년 해소되었습니다.
문제 4. 식민사학의 정체성론에 학문으로 맞선 대표적 성과는?
정체성론은 조선 사회가 스스로 발전하지 못했다는 주장이었고, 백남운은 사회경제사학으로 조선사도 보편적 발전 단계를 밟았다고 반박했습니다. 아와 비아의 투쟁은 박은식이 아니라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나오는 규정이며, 조선사편수회는 식민사학을 생산한 기관입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사전을 만들고 시를 쓰는 일은 총을 드는 일보다 덜 위험한 선택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종류의 위험을 감수한 선택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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