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던지 / 한국사 / 조선 전기 2강. 세종: 문자를 만든 왕

조선 전기 2강. 세종: 문자를 만든 왕

세계의 문자는 대부분 누가, 언제, 왜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한글은 그 셋을 모두 압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1444년 최만리 등이 새 문자에 반대하며 상소의 첫머리에 내세운 논리는?
상소가 가장 먼저 든 근거는 사대(事大)의 명분이었습니다. 중국과 다른 문자를 쓰면 오랑캐와 같아진다는 논리였고, 이두가 이미 있으니 굳이 필요 없다는 실용론이 뒤따랐습니다. 우민화 우려나 재정 문제는 상소의 논점이 아니었습니다.

실록이 남긴 수상한 한 문장

세종실록 1443년 12월 기사에는 이런 문장이 툭 놓여 있습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스물여덟 자를 지었다." 국가적 대사업치고는 예고도, 담당 관청도, 논의 기록도 없습니다. 그리고 3년 뒤인 1446년, 창제 원리를 낱낱이 풀어 쓴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옵니다. 흔히 말하는 창제 1443년, 반포 1446년의 간극이 여기서 나오죠. 이 침묵 때문에 학계에는 오래된 논쟁이 있습니다. 세종이 홀로 만들었다는 친제설과 집현전 학자들이 함께 만들었다는 협찬설입니다. 실록과 정인지의 해례본 서문은 모두 임금이 만들었다고 적고 있어 친제설 쪽이 우세하지만, 해례의 이론 정리와 문헌 작업에 집현전이 깊이 관여한 것도 분명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최만리의 반대 상소가 창제 두 달 뒤에야 올라왔다는 점입니다. 신하들조차 진행을 몰랐다는 정황이죠.

이 문자는 소리를 그렸습니다

한글이 특별한 이유는 글자 수가 적어서가 아니라 만든 원리를 스스로 설명한다는 데 있습니다. 자음의 기본자 다섯은 발음기관을 본떴습니다. ㄱ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양, ㄴ은 혀끝이 윗잇몸에 닿는 모양, ㅁ은 입, ㅅ은 이, ㅇ은 목구멍의 모양입니다. 여기에 소리가 세지면 획을 더합니다. ㄴ에서 ㄷ으로, ㄷ에서 ㅌ으로 가는 식이죠. 모음은 하늘(ㆍ), 땅(ㅡ), 사람(ㅣ)의 삼재를 기본으로 삼아 조합했습니다. 즉 글자 모양 안에 발음 정보가 들어 있습니다.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샘슨이 1985년 한글을 자질문자(featural script)라는 별도 범주로 분류한 것이 이 때문입니다. 알파벳이 소리 하나에 기호 하나를 배정한다면, 한글은 소리의 성질까지 형태에 반영했습니다.

상소 하나가 남긴 기록

1444년 2월,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를 비롯한 학자들이 반대 상소를 올립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이 무식한 수구파가 아니라 세종이 손수 키운 집현전의 핵심이었다는 점입니다. 논리는 세 갈래였습니다. 중국과 문자를 달리하면 스스로 오랑캐가 된다는 명분론, 이두로 충분한데 새 문자가 왜 필요하냐는 실용론, 쉬운 글자가 생기면 선비들이 어려운 학문을 소홀히 한다는 우려였습니다. 세종의 반박은 날카롭습니다. 그대들은 음운의 이치를 아느냐, 사형 판결문을 이두로 적으면 억울한 백성이 자기 죄목을 읽을 수 있느냐고 되묻죠. 이 논쟁은 우리에게 뜻밖의 선물을 남겼습니다. 문자를 만든 이유가 실록에 통치자의 육성으로 기록되어 버린 것입니다. 해례본 서문의 유명한 첫머리,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맞지 않으니 백성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펴지 못한다는 문장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이 상소가 역설적으로 증명합니다.

하늘을 재고 시간을 나눈 나라

세종 대의 과학은 문자와 같은 목적을 향합니다. 백성이 먹고사는 문제를 데이터로 다루겠다는 것이죠. 1441년 만들어진 측우기는 강우량을 수치로 재서 전국에서 같은 규격으로 보고하게 했습니다. 농사와 조세의 근거가 관찰자의 감이 아니라 숫자가 된 것입니다. 1434년 장영실 등이 완성한 자격루는 스스로 종과 북을 울려 시각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였고, 1444년의 칠정산은 더 결정적입니다. 그때까지 조선은 중국 수도를 기준으로 만든 역법을 그대로 썼는데, 칠정산은 원나라의 수시력과 이슬람 계통의 회회력을 들여와 한양을 기준으로 해와 달과 다섯 행성의 움직임을 다시 계산했습니다. 남의 역법을 베낀 것이 아니라 남의 계산법을 자기 하늘에 맞춰 고쳐 쓴 것이죠. 덕분에 일식과 월식 예보의 오차가 눈에 띄게 줄었습니다.

집현전이라는 인재 설계

이 모든 일은 사람에서 나왔습니다. 1420년 확대 개편된 집현전은 젊은 문신들을 모아 왕의 자문과 연구를 맡긴 기관입니다. 세종은 여기에 두 가지 장치를 겁니다. 하나는 오래 두는 것입니다. 유능한 학자를 다른 자리로 돌리지 않고 십수 년씩 붙잡아 두어 전문성이 쌓이게 했습니다. 다른 하나가 1426년의 사가독서(賜暇讀書), 즉 젊은 관료에게 유급 휴가를 주어 오직 독서만 하게 한 제도입니다. 성삼문과 신숙주, 박팽년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다만 집현전의 운명은 뒷맛이 씁니다. 세조가 단종 복위 사건 이후 1456년 집현전을 폐지하면서, 인재를 길러 왕권을 뒷받침하려던 설계는 인재가 왕권에 맞선다는 이유로 끝납니다. 그 긴장이 다음 강의 훈구와 사림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훈민정음의 창제와 해례본 간행 시점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세종실록은 1443년 12월에 임금이 스물여덟 자를 지었다고 기록했고, 창제 원리를 해설한 해례본은 1446년에 나왔습니다. 두 해가 3년 떨어져 있어 창제와 반포를 구분해 부르며, 흔히 1446년 하나만 기억해 혼동합니다.
문제 2. 한글 자음의 제자 원리로 옳은 것은?
ㄱ, ㄴ, ㅁ, ㅅ, ㅇ은 각각 혀뿌리와 혀끝, 입, 이, 목구멍의 모양에서 왔고 ㄴ에서 ㄷ, ㄷ에서 ㅌ처럼 획을 더해 거센 소리를 나타냈습니다. 파스파 문자와의 영향 관계는 일부 학자가 제기하는 가설일 뿐, 해례본이 밝힌 제자 원리는 상형과 가획입니다.
문제 3. 1444년 완성된 칠정산의 역사적 의의는?
그전까지 조선은 중국 수도를 기준으로 만든 역법을 그대로 썼기 때문에 일식과 월식 예보에 오차가 생겼습니다. 칠정산은 수시력과 회회력의 계산법을 한양의 위도에 맞춰 고쳐 이 오차를 줄였습니다. 지동설이나 태양력과는 무관하며, 측우기와는 별개의 사업입니다.
문제 4. 세종이 집현전 운영에 도입한 사가독서 제도의 내용은?
사가독서는 1426년 시작된 유급 연구휴가 제도로, 성삼문과 신숙주 같은 인재가 여기서 배출되었습니다. 실무 배치나 지방 교육 지원과는 성격이 다르며, 집현전은 자문과 연구 기관이었을 뿐 인사권을 가진 곳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문자는 만들어졌지만 공문서와 과거 시험은 이후로도 오래 한문으로 치러졌습니다. 훌륭한 도구가 곧바로 사회를 바꾸지 못한 이 시차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전: 조선 전기 1강 · 다음: 조선 전기 3강

모던지 · 궁금하면 모던지 GitHub · 2026-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