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4강. 세도정치: 시스템의 고장
세금 걷는 장부에 죽은 사람과 갓난아기의 이름이 올라 있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방식은 보통 이렇게 사무적입니다.
풀고 시작
왕은 있는데 왕정이 없습니다
1800년 정조가 갑자기 죽고 열한 살 순조가 즉위한 뒤, 조선의 권력은 이상한 자리로 옮겨 갑니다. 왕의 장인 김조순을 축으로 한 안동 김씨가 국정을 쥐었고, 헌종 대에는 풍양 조씨가, 철종 대에는 다시 안동 김씨가 그 자리를 이어받습니다. 순조와 헌종과 철종 3대에 걸친 60여 년, 이것이 세도정치입니다.
무서운 점은 이 권력이 제도를 부수는 대신 제도를 그대로 타고 앉았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후 최고 기구로 커진 비변사를 소수 가문이 장악하자, 의정부도 육조도 허수아비가 되었습니다. 왕은 즉위했지만 인사권이 없었죠. 특히 철종은 강화도에서 농사짓다가 왕이 된 인물이라 자기를 세운 가문에 맞설 기반이 아예 없었습니다. 관직이 가문 안에서 돌자 과거는 형식이 되었고, 수령 자리는 값을 치르고 사는 물건이 됩니다. 돈을 주고 자리를 산 수령이 임지에서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본전을 뽑는 것이죠.
죽은 사람에게도, 갓난아기에게도
그 본전 뽑기의 통로가 삼정, 즉 전정과 군정과 환곡이었습니다. 전정에서는 이미 못 쓰게 된 땅에 세금을 매기고(진결), 장부에 없는 땅을 몰래 부치고, 온갖 잡비를 토지세에 얹었습니다. 군정은 더 노골적이었습니다. 죽은 사람 이름으로 군포를 걷는 백골징포, 갓난아기를 장정으로 올려 걷는 황구첨정, 도망친 이웃과 친척 몫까지 대신 물리는 인징과 족징이 버젓이 행해졌습니다. 정약용이 남긴 시 「애절양」은 군포를 감당 못한 남자가 스스로 생식기를 자른 사건을 다룹니다. 아이를 낳으면 또 세금이 붙으니까요.
여기서 짚을 것은 이것이 개별 관리의 인성 문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감시할 왕도, 견제할 붕당도, 고발을 받아 줄 언로도 함께 멈춰 있었습니다. 고장 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이었습니다.
1811년과 1862년, 두 번의 폭발
1811년 겨울 평안도에서 홍경래의 난이 터집니다. 몰락 양반 홍경래가 주도했지만 여기에 서얼 지식인, 광산에 몰린 임노동자, 상업으로 돈을 번 지역 부호까지 합류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평안도는 상업과 광업으로 부를 쌓았는데도 관직에서 조직적으로 배제되던 지역이었고, 그 오래된 차별이 세도정치의 수탈과 만나 터진 것이죠. 봉기군은 청천강 이북을 한때 장악했고, 정주성에 들어가 넉 달을 버티다 1812년 봄에 진압됩니다.
50년 뒤인 1862년, 이번에는 전국이 흔들립니다. 경상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진주 농민들이 들고일어난 것을 시작으로 그해에만 70곳 넘는 고을에서 봉기가 이어졌습니다. 임술민란입니다. 정부는 안핵사 박규수를 보내 사태를 조사하게 했고, 그의 건의로 삼정이정청을 세워 개혁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구는 몇 달 만에 흐지부지 사라집니다. 삼정을 고치려면 세도 가문의 이익을 건드려야 하는데, 그 개혁을 결정할 사람들이 바로 그 가문이었으니까요.
하늘을 다시 정의한 사람들
나라가 답을 주지 못하면 사람들은 다른 데서 답을 찾습니다. 18세기 후반 일부 남인 학자들이 서학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 천주교는 1784년 이승훈의 세례를 계기로 신앙 공동체가 됩니다. 조정이 이를 위험하게 본 이유는 교리 자체보다 제사 거부에 있었습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조선의 신분 질서와 가족 윤리를 통째로 부정하는 일이었거든요.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로 이어지는 대규모 탄압이 뒤따랐지만 신자 수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말이 삼정의 문란을 겪는 이들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1860년에는 경주의 몰락 양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합니다. 서학에 맞선다는 뜻의 이름이지만, 내용은 서학 배척보다 훨씬 대담했습니다. 사람이 곧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시천주와, 낡은 세상이 끝나고 새 세상이 열린다는 후천개벽이 핵심이었죠. 조정은 1864년 최제우를 삿된 도로 세상을 어지럽혔다는 좌도난정 죄로 처형하지만, 2대 교주 최시형이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고 조직을 다지면서 동학은 삼남 지방으로 퍼집니다. 이 흐름이 30년 뒤 동학농민운동으로 폭발합니다.
대원군의 응답, 그리고 닫힌 문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고 열두 살 고종이 즉위하자, 그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잡습니다. 그의 진단은 정확했습니다. 세도 가문의 소굴이 된 비변사를 사실상 폐지하고 의정부와 삼군부를 되살렸으며, 『대전회통』을 엮어 법전을 정비했습니다. 지방 양반의 근거지이자 면세 특권 덩어리였던 서원을 47개만 남기고 철폐했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물리는 호포제와 민간이 운영하는 사창제로 삼정에 손을 댔습니다. 다만 왕실의 권위를 세우려 밀어붙인 경복궁 중건은 원납전이라는 기부금 강요와 고액 화폐 당백전 발행으로 이어져 물가를 흔들었고, 백성의 원성을 샀습니다.
대외 정책에서는 문을 걸어 잠급니다. 1866년 병인박해 뒤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함락한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대원군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화친 주장을 매국으로 못 박습니다. 여기서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조선이 본 서양은 교섭 상대가 아니라 함포를 앞세워 들어온 침입자였으므로 거부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었고, 동시에 그 선택이 개혁의 시간을 벌어 준 것도 아니었습니다. 문은 결국 열립니다. 다만 여는 주체가 조선이 아니었을 뿐이죠. 다음 강에서 1876년 강화도조약을 만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대원군은 세도 가문을 걷어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힘을 왕실 권위 회복에 썼습니다. 만약 같은 힘을 조세와 신분 제도 개편에 몰아넣었다면 이후 30년은 달라졌을까요, 아니면 국제 정세상 결과는 같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