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4강. 총동원: 이름마저 빼앗긴 시간
마지막 8년은 땅과 곡식만 가져간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언어와 이름과 사람을 가져갔습니다.
풀고 시작
전쟁이 통치의 얼굴을 바꾸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며 일본은 국력을 전쟁에 모두 쏟는 체제로 들어갑니다. 이때 조선의 위치가 바뀝니다. 통치의 대상이던 식민지가 병참기지로 재설정된 것입니다. 전쟁을 치르려면 물자와 사람이 필요했고, 조선인을 일본의 신민으로 만들어야 그 동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것이 황국신민화 정책입니다. 1937년부터 어린 학생까지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했고, 신사참배와 궁성요배를 일상 의례로 강요했습니다. 교육에서는 조선어가 밀려났습니다. 1938년 조선어는 선택 과목으로 격하되어 사실상 배제되었고, 1943년에는 교과에서 아예 사라집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이 시행되었습니다. 형식은 신고제였지만 학교 입학과 배급, 관공서 업무에서 불이익이 뒤따랐기 때문에 강제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조상의 성을 바꾸라는 요구가 어떤 의미였는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사람을 물자로 계산한 체제
1938년 일본은 국가총동원법을 조선에 적용합니다. 이 법 아래에서 노동력과 물자를 국가가 필요에 따라 가져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39년 국민징용령을 시작으로 조선인들이 탄광과 군수공장, 비행장 건설 현장으로 끌려갔습니다. 1943년에는 학도지원병 제도로 학생들이 전장에 동원되었고, 1944년부터는 징병제가 시행되어 조선 청년이 일본군 병사가 되었습니다.
후방도 비어 갔습니다. 미곡은 공출로 걷어 가고 배급으로 되돌려 주는 구조가 자리 잡았고, 놋그릇과 숟가락 같은 금속까지 무기 재료로 걷어 갔습니다. 1944년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여성 노동력 동원도 제도화됩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있습니다. 일본군이 설치와 운영에 관여한 위안소에 조선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여성들이 동원되어 성노예 상태에 놓였습니다.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던 이 사실은 1991년 김학순의 공개 증언을 계기로 세상 앞에 드러났고, 1993년 일본 정부의 고노 담화는 군의 관여와 모집 과정의 강제성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동원 방식의 구체적 형태와 국가 책임의 법적 성격을 두고는 한일 간에, 또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피해자들의 증언과 국제기구의 조사가 축적되어 있고, 이것이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해결을 요구받는 인권 문제라는 점입니다.
어둠 속에서 준비한 사람들
가장 캄캄한 시기에도 준비는 이어졌습니다. 1940년 9월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습니다. 총사령은 지청천이었죠. 1941년 12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을 일으키자 임시정부는 곧바로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합니다. 광복군은 1943년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함께 활동했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손잡고 국내로 진입하는 작전을 훈련했습니다. 그러나 훈련이 끝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이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김구가 이 소식을 듣고 기쁨보다 낙심이 컸다고 회고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한편 화북에서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중국공산당 지역에서 활동했고, 국내에서는 1944년 8월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건국동맹이라는 비밀 조직이 만들어져 해방 이후를 준비했습니다. 임시정부는 1941년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담은 건국강령을 발표해, 정치와 경제와 교육에서 균등을 이루는 나라의 밑그림을 미리 그려 두었습니다.
해방이라는 이중의 문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조선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시킨다고 선언했습니다. 독립을 국제적으로 약속받았다는 점에서 큰 성과였지만, '적당한 시기'라는 표현 속에는 곧바로 주권을 넘기지는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은 해방의 날이었습니다. 동시에 국내 진공 작전을 실행하지 못한 채 맞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해방은 처음부터 두 얼굴이었습니다. 한쪽에는 수십 년의 저항이 있었고, 다른 한쪽에는 연합국의 승리와 그들이 그은 선이 있었습니다. 광복 직후 8월 하순에 소련군이 북쪽으로 들어왔고, 9월 8일에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합니다.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두 점령군이 마주 선 것입니다. 다음 강에서 다룰 해방 공간은 바로 이 두 얼굴이 부딪치는 자리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국내 진공 작전이 실행된 뒤에 해방을 맞았다면 이후의 역사는 달라졌을까요, 아니면 강대국이 그은 선은 그대로였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