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1강. 역성혁명: 새 나라의 설계도
조선은 칼로 세워졌지만 설계도는 붓으로 그려졌습니다. 문제는 설계자가 두 명이었다는 것입니다.
풀고 시작
압록강에서 돌아선 군대
1388년, 고려는 명나라를 치겠다며 요동 정벌군을 보냅니다. 그런데 총사령관 이성계는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멈춰 섭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고, 여름철 출병은 무리이며, 왜구가 빈틈을 노리고, 장마에 활의 아교가 풀어진다는 네 가지 이유, 이른바 4불가론이었습니다. 조정이 진군을 명하자 그는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향합니다. 최영은 제거되고 우왕은 폐위됩니다. 쿠데타는 성공했지만,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들은 바로 왕이 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혁명은 토지대장에서 시작됐다
칼만으로는 나라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고려 말의 진짜 문제는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삼을 만큼 토지를 독점한 것이었죠. 1391년 시행된 과전법은 기존 토지 문서를 사실상 무효화하고, 경기 지역 토지의 수조권(조세를 거둘 권리)을 현직과 전직 관리에게 다시 나눠 주었습니다. 구세력의 돈줄을 끊고 새 세력의 월급 체계를 만든 셈입니다. 경제 기반이 무너진 고려는 이듬해인 1392년 조용히 문을 닫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오릅니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즉 왕의 성씨를 바꾸는 혁명이 완성된 것입니다.
두 개의 설계도: 재상이냐 왕이냐
새 나라의 청사진을 그린 사람은 정도전이었습니다. 그는 1394년 『조선경국전』에서 과감한 주장을 폅니다. 왕은 세습되므로 현명할 수도 어리석을 수도 있지만, 재상은 시험과 검증으로 뽑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의 실권은 재상에게 두고 왕은 그 재상을 잘 뽑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왕조 국가에서 이만큼 위험한 설계도도 드뭅니다. 실제로 그 위험은 현실이 됩니다. 개국 과정에서 공이 컸던 이방원은 왕권 중심의 나라를 원했고, 정도전이 어린 세자 방석을 받들며 사병 혁파까지 밀어붙이자 1398년 군사를 일으킵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은 살해되고, 1400년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은 사병을 없애고 6조가 왕에게 직접 보고하게 만들며 왕권을 세웁니다. 설계자는 죽었지만, 흥미롭게도 그가 그린 유교 국가의 틀 자체는 살아남았습니다.
법전으로 완성된 나라
조선은 왕의 기분이 아니라 법으로 다스리는 나라를 지향했습니다. 그 완성이 경국대전입니다. 세조 때 편찬을 시작해 성종 대인 1485년부터 시행된 이 법전은 이전(관료), 호전(재정), 예전(의례), 병전(군사), 형전(형벌), 공전(토목)의 6전 체제로 국가 운영 전체를 규정했습니다. 건국 후 약 90년에 걸쳐 통치 체제가 문서로 고정된 것이죠. 한양 천도(1394)도 같은 논리 위에 있습니다. 개경의 구세력 기반에서 벗어나고, 한강 수운으로 세곡을 모으기 좋으며, 풍수상 명당이라는 실리와 명분을 모두 챙긴 선택이었습니다. 경복궁 좌우에 종묘와 사직을 두고 사대문 이름에 인(仁), 의(義), 예(禮)를 새겨 넣은 도시 설계는, 수도 자체를 유교 이념의 교과서로 만들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정도전의 재상 중심제와 태종의 왕권 중심제 중 어느 쪽이 500년 왕조의 지속에 더 크게 기여했을까요. 세종이라는 성군은 어느 체제의 산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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