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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항기 4강. 대한제국: 늦은 개혁, 빼앗긴 주권

황제의 나라를 선포한 지 13년 만에 나라가 사라졌습니다. 그 13년이 헛되었는지는 지금도 논쟁 중입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직접 빼앗긴 권한은?
을사늑약의 핵심은 외교권 박탈과 통감부 설치였습니다. 사법권은 1909년 기유각서로, 군대는 1907년 정미7조약 뒤의 군대 해산으로 각각 따로 빼앗겼기 때문에 시기를 구분해야 합니다. 국권 상실은 한 번에 온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왕비가 궁궐 안에서 살해되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챙기자 러시아와 프랑스, 독일이 압박해 되돌려 놓습니다. 삼국간섭입니다. 일본이 힘으로 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조선 왕실은 러시아 쪽으로 기울었고,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극단적인 수단을 택합니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인들이 경복궁에 난입해 명성황후를 시해을미사변입니다. 한 나라의 왕비가 자기 궁궐에서 외국인 손에 살해된 사건은 당시 국제 사회에서도 충격이었습니다.

뒤이은 을미개혁이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내리자 분노는 폭발합니다. 유인석을 비롯한 유생들이 이끄는 을미의병이 전국에서 일어났죠.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깁니다. 아관파천입니다. 왕이 남의 나라 공사관에서 국정을 보는 1년 동안 열강의 이권 요구가 밀려들었습니다. 광산과 삼림, 철도가 줄줄이 넘어갔고, 최혜국 대우 조항 탓에 한 나라에 준 것은 다른 나라에도 줘야 했습니다.

신문과 광장이 생기다

바로 이 시기에 전혀 다른 종류의 힘이 자랍니다. 갑신정변 실패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돌아와 1896년 순한글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세웁니다. 청 사신을 맞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운 것은 상징적인 선언이었죠.

독립협회는 곧 토론의 조직이 됩니다. 1898년 종로에서 열린 만민공동회에는 신분과 직업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이 모여 러시아의 이권 요구를 공개적으로 규탄했습니다. 백정 출신 박성춘이 연단에 올라 연설한 관민공동회 장면은 조선 사회의 지반이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자리에서 나온 헌의 6조는 재정을 탁지부로 일원화하고 중추원을 의회처럼 운영하자는 요구까지 담았습니다. 그러나 황제권을 제한한다는 위기감 속에 정부는 보부상 단체인 황국협회를 동원해 충돌을 유도했고, 1898년 12월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합니다. 광장은 닫혔습니다.

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고로

그 사이 고종은 경운궁으로 돌아와 1897년 10월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올립니다. 국호는 대한제국, 연호는 광무였습니다. 청의 책봉 체제에서 벗어난 대등한 주권국임을 선포한 것이죠.

광무개혁의 원칙은 구본신참, 옛 제도를 근본으로 삼고 새 제도를 참고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과는 적지 않았습니다. 전국의 토지를 다시 측량하는 양전 사업을 벌여 근대적 소유 문서인 지계를 발급했고, 원수부를 세워 황제가 군을 직접 통솔했으며, 상공업과 실업 교육을 장려하고 유학생을 보냈습니다. 한성에 전기 회사가 서고 전차가 달린 것도 이 시기입니다.

문제는 방향이었습니다. 1899년 반포된 대한국 국제는 대한제국이 전제 정치를 하는 나라이며 황제가 무한한 군권을 갖는다고 못 박았습니다. 독립협회가 요구한 의회는커녕 권력의 집중이 명문화된 것이죠. 그래서 평가가 갈립니다. 열강 사이에서 자주적 근대화를 실제로 밀어붙인 개혁이었다는 해석과, 재정 기반이 약한 상태에서 황제권 강화에 치우쳐 사회적 지지를 얻지 못했다는 비판이 함께 있습니다. 최근에는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인정하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논의가 많습니다.

조약으로 지워진 나라

1904년 러일전쟁이 터지자 일본은 대한제국의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한일의정서로 군사 요충지 사용권을 확보합니다. 이어 제1차 한일협약으로 재정과 외교에 고문을 앉혔죠. 1905년에는 미국과 가쓰라 태프트 협정을,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고 포츠머스 조약으로 러시아의 승인까지 받아 냅니다. 열강이 차례로 손을 뗀 뒤인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강요됩니다.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두는 조약이었습니다. 고종은 끝내 비준하지 않았고, 이 절차상의 하자는 오늘날 조약이 무효라는 주장의 핵심 근거로 제시됩니다. 황성신문에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 실렸고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과 이준, 이위종을 보내 조약의 무효를 알리려 했습니다. 회의장 문턱조차 넘지 못했지만 일본은 이를 구실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정미7조약으로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심은 뒤 군대를 해산합니다.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까지 넘어갔고, 1910년 8월 29일 병합조약이 공포됩니다.

총을 든 사람들, 학교를 세운 사람들

해산당한 군인들은 총을 들고 산으로 갔습니다. 훈련된 병력이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은 전투력이 크게 올라갔고, 1908년 초에는 각지 의병이 모인 13도 창의군이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합니다.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의병이 전국 단위로 결집한 최초의 시도였습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초대 통감을 지낸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합니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 밝히고 이 행위가 개인의 복수가 아니라 전쟁 행위임을 주장했으며, 옥중에서 한중일이 함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동양평화론』을 쓰다가 끝맺지 못한 채 1910년 순국했습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실력을 기르자는 애국계몽운동이 퍼집니다. 안창호와 양기탁 등이 만든 비밀결사 신민회는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세웠고,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은 담배를 끊고 비녀를 팔아 나랏빚을 갚자는 모금으로 번졌습니다. 무장 투쟁과 교육 운동이라는 두 갈래는 곧이어 시작될 일제강점기의 저항으로 이어집니다. 다음 강에서 그 시간을 만납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고종이 1896년 아관파천을 단행한 배경과 그 결과로 옳은 것은?
왕비가 궁궐에서 살해되고 단발령으로 의병이 일어난 상황에서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 1년 동안 광산과 삼림, 철도 이권이 열강에 넘어갔고 최혜국 대우 조항 때문에 양보가 연쇄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중립 선언은 1904년의 일로 시기가 다릅니다.
문제 2. 1898년 관민공동회에서 채택된 헌의 6조의 성격을 가장 잘 설명한 것은?
헌의 6조는 재정 일원화와 중추원의 의회식 운영을 담아 황제권을 제도적으로 견제하려 했습니다. 정부가 위협을 느껴 황국협회를 동원하고 독립협회를 해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황제권을 명문화한 문서는 이듬해의 대한국 국제이고, 신분제와 과거제 폐지는 1894년 갑오개혁의 조치입니다.
문제 3. 광무개혁의 원칙과 대표 사업을 바르게 짝지은 것은?
광무개혁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삼고 새 제도를 참고한다는 구본신참을 내걸었고, 근대적 토지 문서인 지계 발급과 황제 직속 군령 기구인 원수부 설치가 대표 사업입니다. 별기군과 통리기무아문은 1880년대 초의 기구이고, 집강소는 1894년 농민군의 기구이므로 시기가 전혀 다릅니다.
문제 4.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 이후 벌어진 일의 순서로 옳은 것은?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이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으로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이 들어온 다음 군대가 해산되었습니다. 을사늑약은 1905년으로 앞서고, 안중근 의거는 1909년, 기유각서도 1909년이므로 모두 뒤의 일입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정미의병의 전투력이 크게 올라간 것이 이 연쇄의 결과입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광무개혁을 두고 자주적 근대화의 시도라는 평가와 황제권 강화에 치우친 뒤늦은 개혁이라는 평가가 맞섭니다. 어느 쪽 근거가 더 설득력 있다고 보시나요. 그리고 개혁의 성패를 판단할 때 남은 시간이라는 조건을 얼마나 감안해야 할지 함께 생각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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