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강. 왕건: 통합의 기술자
왕건은 적을 부수는 대신 사돈으로 만들었습니다. 부인 29명은 애정의 기록이 아니라 통일의 설계도입니다.
풀고 시작
궁예와 견훤은 실패하고 왕건만 성공한 이유
10세기 초 한반도에는 왕이 셋이었습니다. 후고구려의 궁예, 후백제의 견훤, 그리고 쪼그라든 신라입니다.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부르며 관심법으로 신하의 마음을 읽는다고 주장하다가 부하들에게 쫓겨났고, 그 자리에 추대된 인물이 송악의 호족 출신 왕건(877~943)입니다. 견훤은 군사적으로는 가장 강력했지만 927년 경주를 습격해 신라 왕을 죽게 만든 탓에 민심을 잃었고, 말년에는 아들에게 금산사에 유폐당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견훤은 탈출해 적국 고려의 왕건에게 투항합니다.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이 스스로 나라를 바쳤고, 936년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가 무너지며 통일이 완성됩니다. 힘이 아니라 포용이 승부를 갈랐다는 것이 이 통일의 핵심입니다.
부인 29명의 정치학
왕건의 부인은 29명입니다. 이 숫자는 사생활이 아니라 통치 기술입니다. 당시 지방은 성주, 장군을 자칭하는 호족들이 사실상 독립적으로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은 이들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대신 유력 호족의 딸과 혼인해 사돈이 되었고, 공이 큰 호족에게는 왕씨 성을 내리는 사성 정책으로 의제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당근만 쓴 것은 아닙니다. 호족의 자제를 수도에 머물게 하는 기인 제도로 사실상의 인질을 잡아 두었죠. 죽기 전에는 후대 왕들을 위한 유훈 훈요십조를 남겼는데, 불교를 중시하되 사원 남설을 경계하라는 조항과 서경(평양)을 중시하라는 조항이 유명합니다. 국호 고려부터가 선언입니다.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뜻으로, 북진 정책의 방향까지 이름에 담은 것입니다.
광종, 미소를 거둔 4대 왕
혼인 정책에는 청구서가 따라왔습니다. 외척이 된 호족들이 왕위 계승에 개입하면서 왕건 사후 정국은 피로 물듭니다.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한 인물이 4대 광종(재위 949~975)입니다. 956년 노비안검법으로 호족들이 불법으로 노비 삼은 사람들을 양인으로 풀어 주었는데, 이는 인권 정책이기 이전에 호족의 경제력과 사병 기반을 해체하는 조치였습니다. 958년에는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를 도입합니다. 가문이 아니라 시험으로 관료를 뽑겠다는 것, 즉 충성의 대상을 가문에서 국왕으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광종은 광덕, 준풍이라는 독자 연호까지 사용하며 황제국의 위상을 과시했고, 개혁에 저항하는 공신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성종, 시스템을 완성하다
광종이 힘으로 왕권을 세웠다면 6대 성종(재위 981~997)은 제도로 나라의 틀을 완성합니다. 성종은 신라 6두품 계열 유학자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받아들여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최승로는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의 근본이라며 종교와 정치의 역할을 구분했죠. 성종은 전국 주요 지역 12목에 처음으로 지방관을 파견해 호족의 땅이던 지방을 국가 행정망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건국 후 약 60년, 호족 연합 정권으로 출발한 고려는 이렇게 유교적 중앙집권 국가로 변모합니다. 그런데 이 안정이 낳은 새로운 지배층이 다음 강의 주인공, 문벌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혼인 정책은 통일에는 효과적이었지만 왕위 계승 분쟁이라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단기 통합과 장기 안정이 충돌할 때, 창업자는 무엇을 우선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