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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와 고대 4강. 남북국 시대: 두 나라의 200년

통일의 마지막 상대는 고구려가 아니라 당이었습니다. 그리고 북쪽에는 아직 무너지지 않은 나라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신라가 곧바로 맞서 싸워야 했던 상대는?
당은 웅진도독부와 안동도호부를 두고 경주에까지 계림도독부를 설치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 했습니다. 신라는 670년부터 676년까지 나당 전쟁을 치러 당군을 몰아냈고, 이 전쟁이야말로 통일의 마지막 단계였죠. 가야는 이미 6세기에 신라에 병합된 뒤였습니다.

손님이 집주인 행세를 시작했습니다

660년 백제가, 668년 고구려가 무너졌습니다. 그런데 전쟁은 끝나지 않았죠.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심지어 경주에까지 계림도독부를 두고 신라 왕을 자기네 도독으로 임명합니다. 동맹이 아니라 흡수였습니다. 김춘추가 데려온 손님이 집주인 행세를 시작한 것이죠.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 세력을 지원하고 옛 백제 땅을 직접 접수하며 정면으로 맞섭니다. 670년부터 676년까지 이어진 나당 전쟁에서 신라는 675년 매소성 싸움과 676년 기벌포 해전으로 당군을 밀어냈고, 당은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깁니다. 신라의 경계는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에서 굳어졌습니다. 다만 이 선이 전쟁이 끝나자마자 확정된 것은 아니어서, 당이 대동강 이남에 대한 신라의 영유를 공식으로 인정한 것은 한참 뒤인 735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통일은 완전했을까요

여기서 한국사에서 가장 오래된 평가 논쟁이 시작됩니다. 불완전 통일론은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외세인 당을 끌어들였다는 점, 그리고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잃어 만주가 통째로 빠졌다는 점입니다. 신채호 이래 이 비판은 강하게 이어져 왔습니다.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7세기 사람들에게 삼국은 애초에 하나의 '우리'가 아니었으므로 근대 민족 개념을 1300년 전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라는 지적이죠. 게다가 신라는 당을 상대로 6년을 싸워 몰아냈습니다. 종속으로 끝난 통합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어느 쪽 손을 들든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때부터 옛 삼국의 주민과 문화가 하나의 정치체 안에서 섞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정교한 체제에 박힌 결함, 골품제

신문왕은 즉위하자마자 장인 김흠돌의 반란을 진압하고 진골 귀족을 대거 숙청합니다. 682년 국학을 세워 유학을 익힌 관료를 길렀고, 687년 관료전을 지급하고 689년 녹읍을 폐지해 귀족의 경제 기반을 국가가 쥐려 했습니다. 9주 5소경으로 지방을 짜고 옛 고구려와 백제 출신 병사까지 9서당에 편입했죠. 통합을 제도로 굳힌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정교한 체제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하나 박혀 있었습니다. 골품제입니다. 태어난 신분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못 박았죠. 성골이 소멸한 뒤 왕은 진골에서 나왔고, 6두품은 아무리 유능해도 아찬까지가 끝이었습니다. 당의 빈공과에 급제하고 돌아온 최치원이 894년 진성여왕에게 시무 10여 조를 올린 일이 상징적입니다. 왕은 개혁안을 받아들이고 그를 6두품의 상한인 아찬에 임명했지만, 진골 귀족의 벽에 막혀 정작 실행에는 이르지 못했고 최치원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을 떠났습니다. 능력이 신분을 이길 수 없는 나라에서는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먼저 등을 돌립니다.

북쪽에서 다시 일어선 나라

고구려가 망한 지 30년 뒤인 698년, 대조영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 세력을 이끌고 동모산에 나라를 세웁니다. 대조영 본인의 출자는 사료마다 갈리는데, 구당서는 그를 고구려의 갈래로 적었고 신당서는 고구려에 복속해 있던 말갈 출신으로 적었습니다. 처음 국호는 진(震)이었고 곧 발해로 바뀌죠. 무왕은 732년 장문휴를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할 만큼 강경했고, 문왕은 상경으로 도읍을 옮겨 체제를 정비했으며, 9세기 선왕 때에 이르러 당은 발해를 해동성국이라 불렀습니다.

발해가 누구의 나라인가는 지금도 뜨거운 쟁점입니다. 중국 학계는 당의 지방 정권으로, 러시아 쪽은 말갈족 국가로 봅니다. 한국 학계가 고구려 계승을 말하는 근거는 구체적입니다. 발해 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고구려) 국왕이라 칭했고 부여의 풍속을 잇는다고 밝혔습니다. 온돌과 굴식 돌방무덤 같은 유물도 고구려와 이어지죠. 다만 지배층은 고구려계, 다수 주민은 말갈계였다는 이중 구조 역시 널리 인정됩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은 1784년 『발해고』 서문에서 발해를 버린 기존 역사 서술을 비판하며 이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 불렀습니다. 발해는 926년 거란에 무너졌고 유민 상당수가 고려로 넘어옵니다.

200년의 균열, 그리고 후삼국

780년 혜공왕이 피살된 뒤 신라가 문을 닫기까지 150여 년 동안 왕이 스무 명이나 바뀝니다. 진골 귀족의 왕위 다툼이 나라를 갉아먹은 것이죠. 889년 진성여왕 때 세금 독촉에 반발한 원종과 애노가 사벌주에서 봉기하면서 둑이 터집니다. 지방에서는 성을 쌓고 군사를 거느린 호족이 자라났고, 골품제에 막힌 6두품 지식인들이 이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900년 견훤이 완산주에서 후백제를, 901년 궁예가 후고구려를 세우며 후삼국이 열리죠. 918년 궁예를 몰아낸 왕건이 고려를 세우고, 935년 경순왕의 항복과 936년 후백제 멸망으로 다시 하나가 됩니다. 다음 강에서 볼 고려는 바로 이 호족들의 나라에서 출발합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나당 전쟁의 승부를 가른 전투와 그 결과로 옳은 것은?
매소성과 기벌포에서 당군을 꺾은 신라는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황산벌은 660년 백제와의 싸움이고 살수 대첩은 612년 고구려와 수의 전투, 관산성은 554년 백제와의 전투이므로 상대와 시기가 모두 다릅니다.
문제 2. 삼국 통일 불완전론에 대한 반론으로 본문이 제시한 것은?
근대의 민족 개념을 1300년 전에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나당 전쟁으로 당의 지배를 실제로 걷어냈다는 점이 반론의 핵심입니다. 신라의 경계는 대동강 원산만 선에 머물렀으므로 고구려 영토 회복은 사실이 아니고, 발해는 신라와 별개의 독립국이었습니다.
문제 3. 골품제가 남긴 구조적 결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는?
골품제는 타고난 신분이 오를 수 있는 관등의 상한을 정했고 6두품은 아찬을 넘지 못했습니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개혁안을 인정받아 아찬에 올랐지만 그 아찬이 곧 그의 천장이었고 개혁안도 진골 귀족의 벽에 막혔습니다. 능력이 신분을 넘지 못하는 이 구조 때문에 6두품 지식인들이 뒷날 호족과 손잡게 됩니다. 나머지 셋은 오히려 왕권 강화와 통합을 위한 제도적 성과였죠.
문제 4. 발해를 고구려 계승 국가로 보는 근거와 남북국 시대라는 명칭의 출처를 바르게 짝지은 것은?
발해 왕은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고려 국왕이라 칭하고 부여의 풍속을 잇는다고 밝혔으며 온돌과 굴식 돌방무덤 같은 유물도 고구려와 이어집니다. 다만 주민 다수는 말갈계였다는 것이 통설이라 주민 구성을 근거로 삼기는 어렵습니다. 남북국이라는 용어는 1784년 유득공이 발해고 서문에서 제시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전쟁을 끝낸 선택과, 끝까지 자력으로 버티는 선택 중 7세기 신라의 자리에서 무엇이 더 책임 있는 결정이었을까요?
  •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는 근거가 왕실의 계통이라면, 주민 다수의 계통을 근거로 삼는 중국과 러시아의 주장과는 어떤 기준으로 우열을 가릴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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