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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1강. 1919년 3월 1일, 거리로 나온 사람들

총칼로 10년을 눌렀는데, 어느 봄날 맨손의 사람들이 전국의 거리를 가득 채웠습니다.

풀고 시작

문제 1. 1910년대 일제 무단통치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제도는?
1910년대 통치의 핵심은 군인인 헌병이 일반 경찰 업무까지 장악한 헌병 경찰제였고, 조선태형령은 조선인에게만 매질을 허용했습니다. 보통경찰제와 신문 허가는 3.1운동 이후 문화통치기의 장치이니 시기가 다릅니다.

칼을 찬 교사

1910년대 조선의 교실 풍경 하나를 떠올려 보겠습니다. 교단에 선 교사가 제복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차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산수를 가르치는 사람이 무장을 한 것이죠. 이것이 무단통치의 상징입니다. 조선총독은 일본 현역 군인 중에서 임명되었고, 군인인 헌병이 일반 경찰 업무까지 맡는 헌병 경찰제가 시행되었습니다. 헌병 경찰은 재판 없이 즉결 처분을 내릴 수 있었고, 1912년의 조선태형령은 오직 조선인에게만 매질을 허용했습니다. 언론과 집회, 결사의 자유는 사실상 사라졌습니다. 식민지 조선은 거대한 병영처럼 관리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이 진행되었습니다. 정해진 기한 안에 복잡한 절차로 소유를 신고하게 했고, 신고되지 않은 땅과 소유가 불분명한 관청, 왕실 소유지는 총독부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확보된 토지의 상당수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에게 넘어갔고, 오랜 관습으로 인정되던 농민의 경작권은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총독부의 지세 수입은 늘었고, 많은 농민의 처지는 더 불안해졌습니다.

봄을 기다린 사람들

그런데 1919년 초, 눌려 있던 조선에 불씨가 연달아 떨어집니다. 1918년 초 미국 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자, 강대국 논리 속에서도 식민지 지식인들은 가능성을 읽었습니다. 1919년 1월에는 고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독살설이 퍼졌습니다. 2월 8일에는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적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으로, 국내에서 만주와 연해주, 미주로 번지며 몇 달간 이어졌습니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참가자를 약 200만 명, 사망자를 7천 명 이상으로 집계했습니다. 이 수치의 정확성에는 논쟁이 있지만, 전 계층이 참여한 전국적 항쟁이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열일곱 살의 감옥, 불타는 마을

시위가 번지자 일제의 진압은 잔혹해졌습니다. 천안 아우내 장터 시위를 주도한 열일곱 살 유관순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중에서도 만세를 부르다 1920년 순국했습니다. 1919년 4월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는 일본군이 주민들을 교회에 모아 놓고 학살하고 마을을 불태웠습니다. 이 사건은 선교사 스코필드 등의 기록으로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3.1운동은 억눌린 것이 아니라 퍼져 나갔습니다. 두 달 뒤 중국 베이징에서 일어난 5.4운동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만세운동을 직접 거론하며 자극받았음을 밝혔습니다. 식민지의 비폭력 대중운동이 이웃 나라의 운동에 영향을 준 것입니다.

통치의 옷을 갈아입다

총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 일제는 통치 방식을 바꿉니다. 이른바 문화통치입니다. 헌병 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고 신문 발행을 허가했지만, 경찰의 수와 예산은 오히려 크게 늘었고 신문은 검열과 정간에 시달렸습니다. 기만적 전환이었죠. 그러나 3.1운동이 남긴 가장 큰 유산은 따로 있습니다. 한 달 뒤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강에서 이어집니다.

인출 문제

문제 1. 토지조사사업의 결과로 옳은 것은?
기한부 신고제로 파악된 토지 중 미신고지와 소유 불분명지가 총독부로 귀속되어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일본인에게 불하되었습니다. 농민의 관습적 경작권은 오히려 부정되었고, 지세 수입은 늘었습니다.
문제 2. 1919년 초 3.1운동의 배경으로 작용한 사건이 아닌 것은?
임시정부는 3.1운동의 배경이 아니라 결과입니다.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에 수립되었죠. 민족자결주의, 고종의 죽음, 2.8독립선언은 모두 운동에 불을 붙인 배경 사건들입니다.
문제 3. 제암리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919년 4월 화성 제암리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입니다. 스코필드 등 외국인 선교사들의 기록과 사진으로 국제 사회에 폭로되었습니다. 아우내 장터 시위는 별개의 사건입니다.
문제 4. 3.1운동이 가져온 변화로 옳은 것은?
무단통치의 한계를 확인한 일제는 기만적이나마 문화통치로 전환했고, 5.4운동의 지식인들은 조선의 만세운동을 직접 거론했습니다. 그리고 운동의 열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습니다. 자치 허용이나 국제연맹의 독립 결의는 없었습니다.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비폭력 만세 시위는 무장 투쟁보다 약한 방법이었을까요, 아니면 전 계층을 참여시킬 수 있었던 가장 강한 방법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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