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와 금융 2강. 은행은 없는 돈을 만듭니다
은행이 대출을 실행할 때, 금고에서 돈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화면에 숫자가 생겨납니다.
풀고 시작
없던 돈이 생겨나는 순간
은행이 하는 일을 흔히 이렇게 설명합니다. 여윳돈 있는 사람에게 예금을 받아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중개상이라고요. 절반만 맞는 말입니다.
예금자 전원이 같은 날 돈을 찾으러 오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은행은 예금의 일부만 지급준비금으로 남기고 나머지를 굴립니다. 이것이 부분지급준비제도입니다. 여기서 교과서의 유명한 계산이 나옵니다. 지급준비율이 10퍼센트라면 100만 원의 예금 중 90만 원이 대출되고, 그 돈이 다른 계좌에 들어가면 다시 81만 원이 대출되며, 이 과정이 이어져 최초 예금의 최대 10배까지 예금이 부풀어 오릅니다. 통화승수 모형입니다.
핵심은 이 과정에서 누구의 돈도 사라지지 않은 채 통화량만 늘어난다는 점입니다. 예금자의 잔액은 그대로인데 차입자의 계좌에도 잔액이 생겼으니까요. 은행업의 본질이 여기 있습니다.
교과서가 수정된 지점
그런데 이 승수 이야기를 순서까지 그대로 믿으면 안 됩니다. 영국 중앙은행은 2014년 계간지에 실린 글에서 통념을 정면으로 뒤집었습니다. 은행은 예금을 먼저 받아 그중 일부를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대출을 실행하는 순간 예금을 만들어 내며, 필요한 지급준비금은 사후에 조달한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은행이 무한정 돈을 찍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급준비금이 아니라 빌려줄 만한 차입자의 수, 자기자본 규제, 손실 위험, 그리고 중앙은행이 정하는 금리입니다. 실제로 미국은 2020년 지급준비율을 0으로 낮췄지만 은행 시스템은 그대로 작동합니다. 승수 모형은 규모를 가늠하는 도구로는 유용하되, 인과의 방향을 설명하는 모형으로는 부정확하다고 이해하는 편이 정확합니다.
돈을 세는 자가 여러 개인 이유
이렇게 만들어진 돈은 어디까지를 돈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래서 통화량 지표가 여러 개입니다.
중앙은행이 직접 공급한 현금과 지급준비금은 본원통화입니다. 여기에 곧바로 결제에 쓸 수 있는 요구불예금과 수시입출식 예금을 더하면 M1입니다. 여기에 만기 2년 미만의 정기예적금처럼 약간의 대가를 치르면 현금화되는 자산까지 더하면 M2입니다. 더 넓은 범위로 나가면 금융기관유동성과 광의유동성이 있습니다. 지표가 여러 개인 이유는 단순합니다. 현금과 정기예금 사이 어디에 선을 그을지에 정답이 없기 때문이며, 어떤 자를 쓰느냐에 따라 통화가 늘었다는 진단과 줄었다는 진단이 동시에 나올 수 있습니다.
신뢰가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 이틀
부분지급준비제도에는 태생적 약점이 있습니다. 은행의 부채는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예금인데 자산은 만기가 긴 대출과 채권입니다. 모두가 한꺼번에 오면 멀쩡한 은행도 지급이 불가능합니다. 다이아몬드와 딥비그는 1983년 논문에서 이 구조를 모형으로 보였습니다. 남들이 안 찾아갈 것이라 믿으면 아무도 안 찾아가고, 남들이 찾아갈 것 같으면 나도 달려가야 하는 두 개의 균형이 공존한다는 것이죠. 뱅크런은 은행이 부실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예상이 뒤집혀서도 일어납니다.
그래서 예금보험이 등장했습니다. 일정 한도까지 정부가 보장해 주면 달려갈 이유가 사라지니까요. 그런데 2023년 3월 실리콘밸리은행은 이 안전판의 사각지대를 보여 줬습니다. 이 은행 예금은 상당 부분이 보호 한도를 크게 넘는 기업 자금이었고, 금리 급등으로 보유 채권에 평가손실이 쌓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하루 만에 수백억 달러 규모의 인출 요청이 몰렸습니다. 은행은 이틀 만에 폐쇄됐습니다. 창구 앞 줄이 아니라 스마트폰 앱과 단체 대화방이 만든 뱅크런이었다는 점이 이 사건의 진짜 교훈입니다.
규제는 왜, 그리고 어디까지
은행이 무너지면 예금자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결제망과 신용 공급이 함께 멈춥니다. 그래서 은행은 다른 기업과 달리 자기자본 비율, 유동성 확보 비율, 스트레스 테스트 같은 규제를 받고, 중앙은행이 최종대부자로 대기합니다.
다만 여기서 답이 갈립니다. 한쪽은 구제가 예정되어 있으면 은행이 더 위험한 베팅을 한다는 도덕적 해이를 지적하며 자기자본을 훨씬 두껍게 쌓게 하자고 봅니다. 다른 한쪽은 규제 비용이 결국 대출 축소와 금리 상승으로 가계와 중소기업에 전가된다고 봅니다. 2023년 사태를 두고도 소형 은행에 대한 감독 완화가 원인이었다는 진단과, 규제 문턱이 아니라 감독 집행과 경영진의 위험 관리 실패가 문제였다는 진단이 함께 제기됐습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은행의 위험이 결코 은행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 은행 바깥에서 돈이 값을 매기는 곳, 금융시장으로 갑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예금 전액을 정부가 보장해 준다면 뱅크런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 대신 은행은 어떤 위험을 더 감수하게 될까요. 여러분이 규제 당국이라면 어디에 선을 그으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