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을 읽는 법 1강. 없는 사람 이야기를 왜 읽나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이 무너지는데 우리는 진심으로 목이 멥니다. 이 이상한 사건이 문학의 출발점입니다.
풀고 시작
안나 카레니나는 존재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안나 카레니나의 운명에 감동할 수 있는가." 1975년 철학자 콜린 래드퍼드가 논문 제목으로 던진 질문입니다. 우리는 안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책장을 넘기며 심장이 조여 옵니다. 없는 사람 때문에 슬퍼하는 것은 명백히 비합리적인데, 우리는 그 비합리를 기꺼이 반복하고 심지어 돈을 내고 사죠. 철학자들은 이것을 허구의 역설(paradox of fiction)이라고 부릅니다. 답은 아직 하나로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것은 진짜 감정이 아니라 감정의 흉내라는 답이 있고, 실재 여부와 상관없이 생생하게 떠올린 장면 자체가 감정을 일으킨다는 답도 있습니다. 확실한 것은 하나뿐입니다. 없는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 사람을 실제로 흔든다는 사실입니다.
마음의 비행 시뮬레이터
심리학자 키스 오틀리는 소설을 마음의 비행 시뮬레이터에 비유했습니다. 조종사가 추락 위험 없이 악천후 착륙을 연습하듯, 독자는 실제 대가를 치르지 않고 배신과 질투와 몰락을 겪어 본다는 것입니다. 소설이 하는 일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타인의 마음을 안쪽에서 겪게 하는 일입니다. 11세기 초 무라사키 시키부는 『겐지 이야기』(源氏物語)에서 인물들의 미묘한 질투와 체념을 이미 내면에서 그려 냈고, 천 년 뒤의 우리는 그 마음을 여전히 알아봅니다. 뉴스는 "난민 12만 명"이라고 적지만 소설은 그중 한 사람의 하루를 살게 합니다. 숫자로는 열리지 않던 문이 이야기로는 열린다는 것, 이것이 문학 옹호론의 가장 오래된 근거입니다.
그런데 실험실에서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여기서 정직해야 합니다. 2013년 키드와 카스타노는 문학 소설을 잠깐 읽은 참가자들이 사진 속 눈만 보고 감정을 맞히는 검사에서 더 좋은 점수를 냈다고 사이언스에 보고했습니다. 언론은 소설을 읽으면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식으로 이 결과를 받아썼죠. 그런데 2016년 파네로 연구팀이 훨씬 큰 표본으로 다시 해 보니 그 효과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남은 것은 평생 읽은 소설의 양과 사회적 추론 능력 사이의 상관인데, 상관은 방향을 말해 주지 않습니다. 소설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 원래 사람 마음에 관심이 많은 이들이 소설을 집어 든 것인지 알 수 없죠. 그러니 "문학이 사람을 선하게 만든다"는 문장은 아직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 매력적인 가설입니다. 나치 장교 중에도 괴테를 사랑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문장이 감각을 바꿉니다
효용 논쟁과 별개로, 문학이 확실하게 건드리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언어입니다. 우리는 대체로 굳은 표현으로 세상을 봅니다. 문학은 그 굳은 표현을 일부러 어긋나게 만들어 사물을 처음 보는 것처럼 만듭니다. 카프카는 스무 살 무렵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책은 우리 안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썼습니다. 도끼의 날은 줄거리가 아니라 문장입니다. 좋은 소설을 읽고 나면 며칠 동안 세상이 조금 다르게 서술되는 경험, 그것이 문학이 남기는 가장 물리적인 흔적입니다.
재미라는 이유를 변호합니다
그래서 결론이 무엇이냐고요. 재미로 읽어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C. S. 루이스는 『실험적 비평 서설』(An Experiment in Criticism, 1961)에서 좋은 책과 나쁜 책을 나누기보다 어떻게 읽히느냐를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다시 읽고, 문장 앞에서 멈추고, 그 세계에 지배당하기를 허락하는 읽기가 있다면 그 책은 그 사람에게 문학입니다. 나보코프는 현명한 독자란 천재의 책을 심장이나 두뇌가 아니라 등뼈로 읽는 사람이라고 했죠. 어슐러 K. 르 귄은 「미국인은 왜 용을 무서워하는가」(Why Are Americans Afraid of Dragons?, 1974)에서 상상력과 재미를 유치한 것으로 밀어내는 태도 자체를 문제 삼았습니다. 효용만으로 문학을 변호하면 효용이 흔들릴 때 문학도 같이 무너집니다. 재미는 문학의 부산물이 아니라 문학이 사람에게 들어가는 통로입니다. 그러면 그 통로는 어떻게 설계될까요. 다음 강에서는 이야기를 누가 하고 있는지, 그 목소리 하나가 독자의 판단을 어디까지 조종하는지 보겠습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소설을 많이 읽은 사람이 반드시 더 윤리적이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학교가 문학을 계속 가르쳐야 할 이유는 무엇으로 다시 세울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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