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시와 비극 2강. 무대 위에서 무너지는 인간
아테네인은 일 년에 한 번 도시 전체를 극장에 앉혀 놓고, 자기네 영웅이 부서지는 장면을 다 같이 지켜봤습니다.
풀고 시작
공연이 아니라 축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비극을 책으로 읽지만, 원래 그것은 봄마다 열리는 도시 행사였습니다. 아테네의 대(大)디오니시아는 포도주와 도취의 신 디오니소스를 기리는 국가 제전이었고, 디오니소스 극장에는 수천 명이 비탈에 앉아 며칠에 걸쳐 극을 봤습니다. 재정도 흥미롭습니다. 코러스를 훈련시키고 의상을 대는 비용은 코레고스(choregos)라 불린 부유한 시민이 사재로 냈습니다. 세금이라기보다 명예를 사는 공적 의무였고, 우승하면 그 이름이 기념비에 새겨졌습니다. 심사원도 제비뽑기가 섞인 절차로 뽑혀 표를 던졌습니다. 예술가가 후원자를 찾아다닌 것이 아니라, 도시가 예산과 관객과 심판을 통째로 조직해 매년 새 작품을 요구한 것이죠. 기원전 5세기 아테네가 남긴 비극이 그토록 밀도 높은 데는 이 제도적 압력이 있었습니다.
세 사람, 세 개의 세계
현존하는 비극은 서른 편 남짓이고 그마저 세 작가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셋이 서로 무척 다릅니다.
| 작가 | 관심의 중심 | 대표작 |
|---|---|---|
| 아이스킬로스 | 여러 세대에 걸쳐 정의가 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 『오레스테이아』(기원전 458년) |
| 소포클레스 | 자기 성품을 끝까지 밀고 가는 개인의 결단 |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
| 에우리피데스 | 신화의 뒷면, 특히 밀려난 사람들의 목소리 | 『메데이아』(기원전 431년), 『트로이아 여인들』 |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스킬로스가 두 번째 배우를, 소포클레스가 세 번째 배우를 들여왔다고 전합니다. 배우가 한 명 늘 때마다 무대에서 가능한 갈등의 수가 늘어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기술 혁신에 가깝습니다. 가장 논쟁적인 인물은 에우리피데스였습니다. 그는 신들을 미심쩍게 그렸고 여자와 노예와 이방인에게 긴 대사를 줬습니다. 다만 배우와 코러스는 모두 남자였고 여성이 객석에 앉을 수 있었는지조차 아직 확실하지 않으니, 우리가 읽는 여성 인물의 목소리는 남자가 쓰고 남자가 연기한 것입니다. 그런 그를 희극 작가 아리스토파네스는 『개구리』(기원전 405년)에서 저승의 아이스킬로스와 맞붙여 놓고 실컷 놀립니다. 생전에 상은 적게 받았지만 후대에 가장 많이 필사되고 살아남은 것은 에우리피데스였습니다.
코러스는 왜 거기 서 있었을까요
비극의 뼈대는 제법 규칙적입니다. 배우가 상황을 설명하는 프롤로고스로 열고, 코러스가 노래하며 입장하는 파로도스가 이어지고, 배우들의 장면(에페이소디온)과 코러스의 노래(스타시몬)가 번갈아 가다가, 퇴장 노래로 닫힙니다. 여기서 코러스가 하는 일이 핵심입니다. 코러스는 사건을 만들지 못합니다. 늙은 시민, 하녀, 이방 여인처럼 힘없는 자리에 서서 무대 위의 일을 보고 겁내고 훈계하고 애도할 뿐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력함이 관객과 같습니다. 코러스는 극장 안에 들어와 앉은 도시 자체이고, 관객은 코러스를 통해 자기가 이 참사를 어떻게 봐야 할지를 연습합니다. 비극이 개인의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장르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카타르시스는 아직 결론이 없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이 "연민과 두려움을 통해 그러한 감정들의 카타르시스(katharsis)를 이룬다"고 썼습니다. 문제는 그가 그 한 단어를 더 설명하지 않고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이후 이천 년 동안 해석이 갈렸습니다. 몸에 쌓인 감정을 밖으로 빼내는 의학적 배설로 읽는 쪽, 감정을 씻어 도덕적으로 정화하는 것으로 읽는 쪽, 감정 자체가 아니라 무엇이 두려워할 만한 일인지를 또렷하게 알게 되는 인식의 명료화로 읽는 쪽이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승리한 적은 없습니다.
하마르티아(hamartia)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성격적 결함", 특히 오만(휘브리스)으로 옮겨졌지만, 원래 이 말은 활을 쏘아 과녁을 빗나감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주인공을 무너뜨리는 것은 나쁜 성품이 아니라 결정적인 순간의 판단 착오, 알 수 없었던 사실에 대한 무지라는 독법이 현대 고전학에서 힘을 얻었습니다. 이 차이는 큽니다. 앞의 독법에서 비극은 벌 받아 마땅한 자의 이야기가 되지만, 뒤의 독법에서 비극은 성실했는데도 무너진 사람의 이야기가 되니까요.
오이디푸스와 안티고네가 남긴 질문
이 절은 두 작품의 뼈대를 조금 건드리니, 결말의 인상을 아껴 두고 싶다면 통째로 건너뛰고 다음 절로 가셔도 좋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역병의 원인을 찾는 수사극의 형태를 띱니다. 왕은 진실을 밝히라는 명령을 스스로 내리고, 한 걸음씩 정확하게 수사하며, 그 성실함 때문에 끝에 닿습니다. 이 작품이 지금도 무서운 이유는 그가 게을렀다면 살았을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안티고네』는 더 노골적으로 정치적입니다. 반역자로 죽은 오빠를 묻겠다는 안티고네와, 도시의 법으로 매장을 금한 통치자 크레온이 맞섭니다. 헤겔은 여기서 둘 다 옳은 두 개의 정당성이 충돌한다고 봤습니다. 가족과 신들의 오랜 법, 그리고 공동체를 지키는 국가의 법 말입니다. 반면 크레온의 명령은 애초에 정당하지 않았고 이 극은 권력의 폭주를 그린 것이라는 독법도 오래되었고, 20세기에는 점령과 독재에 맞선 저항의 이름으로 안티고네가 몇 번이나 무대에 다시 올랐습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1872)에서 이 장르가 도취(디오니소스적)와 형식(아폴론적)의 위태로운 결합이었고 에우리피데스의 이성이 그것을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지금은 이 진단 자체가 논쟁거리입니다. 어느 독법을 택하든 비극이 우리에게 남긴 질문은 같습니다. 잘못 없이도 무너질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살아야 할까요. 다음 강에서는 무대 대신 시로 세계를 기록한 동아시아의 전통을 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도시가 세금에 가까운 방식으로 매년 새 비극을 요구하는 제도를 오늘 다시 만든다면, 무엇이 만들어지고 무엇이 사라질까요?
- 안티고네와 크레온이 둘 다 옳다는 헤겔의 독법은 지금의 정치적 갈등에도 쓸 수 있을까요, 아니면 강자를 편들게 되는 위험한 중립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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