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탄생 3강. 응접실에서 벌어지는 전쟁
전쟁도 혁명도 나오지 않는 소설에서, 청혼 한 번에 한 사람의 평생이 걸려 있었습니다.
풀고 시작
청혼은 연애가 아니라 생계였습니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1813)의 유명한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재산깨나 있는 독신 남자에게 아내가 필요하다는 것은 세상이 다 인정하는 진리다."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시장 보고서에 가깝습니다. 소설의 무대인 롱본 저택에는 한정상속(entail)이 걸려 있어서, 아버지가 죽으면 재산은 딸들이 아니라 먼 남자 친척에게 넘어갑니다. 딸 다섯이 결혼하지 못하면 온 가족이 거리로 나앉는 구조인 것이죠. 당시 중간 계층 여성에게 허용된 직업은 가정교사 정도였고, 결혼은 애정 문제이기 이전에 남은 평생의 소득을 결정하는 단 한 번의 계약이었습니다. 그래서 오스틴의 응접실 대화는 잡담이 아닙니다. 누가 연 수입 얼마짜리인지, 누가 어느 집안과 이어지는지를 계산하는 소리가 예절의 표면 아래에서 쉬지 않고 돌아갑니다. 제인 오스틴(1775~1817) 본인은 끝내 결혼하지 않았고, 생전에 낸 책은 모두 익명으로 나갔습니다. 첫 책 『이성과 감성』은 "어느 부인이 씀"으로 소개됐고, 이후 책들은 "『이성과 감성』의 저자가 씀"이라는 표기를 달았죠. 이름이 표지에 오른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나온 유고작부터였습니다.
서술이 인물 속으로 들어간 순간
오스틴이 문학사에 남긴 가장 큰 자산은 소재가 아니라 문장 기술입니다. 자유간접화법(free indirect discourse)이라 부르는 방식인데, 인물의 속마음을 따옴표에 넣지도 않고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알려 주지도 않은 채, 3인칭 서술 문장 속에 그대로 섞어 버립니다. 그러면 독자는 인물의 착각 안에 들어앉은 채로 이야기를 따라가게 됩니다. 『에마』(Emma, 1815)에서 주인공이 스스로를 대단한 중매쟁이라고 확신하는 대목을 읽을 때, 우리는 에마의 자신감을 함께 느끼면서 동시에 그 자신감이 얼마나 근거가 없는지도 눈치챕니다. 한 문장이 인물 편과 서술자 편에 동시에 서 있는 셈이죠. 아이러니가 설명이 아니라 문장 구조 자체에서 발생합니다. 이 기법은 뒤에 플로베르가 밀고 나가면서 유럽 소설의 표준 장비가 되고, 20세기 의식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길목이 됩니다. 오스틴을 응접실 안의 소소한 이야기라고 낮춰 부르던 평가가 20세기 들어 뒤집힌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하워스 목사관에서 온 세 남자
1846년, 커러 벨과 엘리스 벨과 액턴 벨이라는 세 남자 이름으로 시집 한 권이 나옵니다. 팔린 것은 두 권이었습니다. 이 처참한 데뷔의 주인공은 요크셔 하워스 목사관에 살던 샬럿, 에밀리, 앤 브론테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이듬해인 1847년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샬럿의 『제인 에어』(Jane Eyre)와 에밀리의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 앤의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가 한 해에 쏟아졌거든요. 『제인 에어』는 예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가정교사가 1인칭으로 자기 분노와 욕구를 그대로 발설하는 소설이었고, 당대 독자에게는 여성 화자가 이렇게 말해도 되는가 자체가 사건이었습니다. 『폭풍의 언덕』은 더 낯설었습니다. 사랑 이야기라기에는 잔혹하고, 화자마저 세 든 신사 록우드와 가정부 넬리 딘이라 사건을 전부 남에게서 전해 듣습니다. 진실이 액자 두 겹 뒤에 있는 구조라 독자는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계속 흔들리죠. 초기 서평 중에는 이 책이 야만적이고 불쾌하다는 반응이 적지 않았습니다.
왜 남자 이름을 빌려야 했을까요
가명은 취향이 아니라 방어였습니다. 샬럿은 1850년 에밀리와 앤의 작품 재판에 붙인 글에서, 여성이 쓴 글이라고 알려지면 비평가들이 작품이 아니라 성별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남자로도 여자로도 읽히는 이름을 골랐다고 밝혔습니다. 실제로 『제인 에어』가 여성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퍼진 뒤, 같은 책을 두고 대담하다는 평이 부도덕하다는 평으로 바뀌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작품은 그대로인데 저자 정보 하나가 바뀌자 평가가 움직인 것이죠. 앞 강에서 본 것처럼 여성 독자가 소설 시장을 떠받치고 있었는데도, 여성 작가는 여전히 이름을 감춰야 했습니다.
응접실을 다시 읽는 눈들
이 소설들은 20세기 후반 페미니즘 비평이 가장 집요하게 파고든 텍스트가 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제인 에어』 중반의 결정적 반전을 언급하니, 직접 읽는 충격을 아끼고 싶다면 다음 문단으로 건너뛰셔도 좋습니다.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는 『다락방의 미친 여자』(The Madwoman in the Attic, 1979)에서, 손필드 저택 다락에 갇혀 있던 로체스터의 첫 아내 버사 메이슨을 주인공이 억눌러 둔 분노의 분신으로 읽었습니다. 얌전한 여주인공과 미친 여자가 한 인물의 두 얼굴이라는 독법이죠. 카리브해 출신 작가 진 리스는 한발 더 나아가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Wide Sargasso Sea, 1966)에서 버사에게 이름과 유년과 목소리를 돌려주는 소설을 아예 새로 썼습니다. 가야트리 스피박은 1985년 논문에서, 제인의 해방이 식민지 출신 여성의 침묵 위에 세워진 것은 아닌지 물었습니다. 오스틴도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1993)에서 『맨스필드 파크』의 저택을 지탱하는 돈이 카리브해 앤티가의 농장에서 온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어느 독법 하나가 정답이라기보다, 이 작품들이 두 세기 동안 계속 새 질문을 견뎌 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다음 강에서는 이 정연한 응접실 바깥에서 감정과 자연을 앞세워 형식을 흔든 낭만주의를 봅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같은 작품인데 저자의 성별이 알려지자 평가가 뒤집혔다면, 우리가 작품을 읽는다고 믿을 때 실제로 읽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 원작에서 침묵당한 인물에게 목소리를 주는 다시 쓰기는 원작을 보완하는 일일까요, 아니면 원작을 반박하는 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