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문학 4강. 말이 사물을 대신할 때
시가 무엇을 말하느냐 대신 시가 무엇을 하느냐를 묻기 시작한 순간, 현대시가 열립니다.
풀고 시작
도시가 시의 소재가 된 날
1857년 파리에서 두 권의 책이 같은 검사에게 기소됩니다. 지난 강에서 본 『보바리 부인』과 샤를 보들레르(1821~1867)의 시집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죠. 이쪽은 유죄가 나서 여섯 편을 빼라는 판결과 벌금이 떨어졌고, 그 판결이 취소된 것은 1949년이니 거의 한 세기가 걸린 셈입니다.
보들레르는 시가 다뤄야 할 것이 자연이나 영원이 아니라 지금의 도시라고 보았습니다. 마침 오스만 남작의 대개조로 파리는 골목이 헐리고 대로가 뚫리던 중이었고, 「백조」에서 그는 도시의 형태가 인간의 마음보다 빨리 변한다고 탄식하죠. 군중 속을 목적 없이 걸으며 흐름을 관찰하는 플라뇌르(flâneur)를 그가 시대의 인물형으로 벼려 냈고, 「현대적 삶의 화가」(1863)에서 그는 현대성(modernité)을 일시적이고 덧없고 우연한 것이라 정의했습니다. 영원한 것만 예술이라던 규범을 뒤집은 것이죠. 「만물조응」에서는 인간이 상징의 숲을 지난다고 쓰고 향기와 색과 소리가 서로 응답한다고 했는데, 이 몇 행이 뒤이은 세대의 강령이 됩니다.
열아홉에 시를 그만둔 사람
아르튀르 랭보(1854~1891)의 문학 생애는 사춘기와 거의 겹칩니다. 열여섯에 시작해 스무 살 무렵 끝냈으니까요. 1871년 그가 보낸 이른바 견자의 편지에는 유명한 문장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타자라는 선언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감각을 오랫동안 어긋나게 만들어 견자가 되어야 한다는 방법론이죠. 시인은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실험 도구로 삼아 낯선 지각을 채굴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폴 베를렌과 유럽을 떠돌았고 그 관계는 1873년 브뤼셀에서 베를렌이 총을 쏘는 사건으로 파국을 맞습니다. 같은 해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자비로 찍었고, 산문시집 『일뤼미나시옹』(Illuminations)은 베를렌의 주선으로 1886년에야 나옵니다. 정작 본인은 문학을 버리고 아프리카로 건너가 무역상으로 살다 서른일곱에 죽었죠. 산문의 몸으로 시를 쓰는 형식은 보들레르가 길을 열고 랭보가 굳혔습니다.
흰 여백을 쓰는 실험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는 평생 영어 교사로 일하며 화요일 저녁마다 집에서 모임을 열었고, 그 방을 발레리와 지드와 예이츠가 드나들었죠. 그의 시는 어렵기로 악명 높지만 어려움 자체가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대상을 지목하는 대신 그 주위를 돌게 해, 사물이 사라진 자리에 관념이 떠오르게 하려 한 것이죠.
이 실험의 극단이 1897년 「주사위 던지기」입니다. 시행이 여백 위에 흩어지고 활자 크기가 제각각이며 두 면을 한 화면으로 읽어야 합니다. 시가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넘어간 순간이고, 20세기 시각시와 타이포그래피 실험이 여기서 갈라져 나옵니다. 이 흐름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장 모레아스로, 1886년 신문에 실은 선언에서 상징주의(symbolisme)를 유파의 이름으로 못 박습니다. 반론도 따라붙었습니다. 소수만 읽는 시가 무슨 소용이냐는 비판과, 언어를 투명한 창문이 아니라 두께를 가진 재료로 되돌려 놓았다는 옹호가 지금도 맞섭니다.
시가 음악을 부러워하던 시절
베를렌은 「시법」에서 무엇보다도 음악을 달라고 썼습니다. 무엇을 지시하지 않고도 사람을 움직이는 음악은 상징주의자들에게 부러움의 대상이었죠. 마침 파리에는 여러 예술을 합치려던 바그너 열풍이 불어 전용 잡지까지 나왔습니다.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는 드뷔시의 전주곡(1894)이 되고 그 곡은 다시 니진스키의 발레(1912)가 됩니다. 회화에서는 모로와 르동이 꿈의 형상을 그렸고, 이 감각은 벨기에의 메테를링크와 아일랜드의 젊은 예이츠에게 번집니다.
영국에서는 캐서린 브래들리와 이디스 쿠퍼가 마이클 필드라는 남성 필명으로 시와 극을 함께 썼고, 정체가 알려지자 평가가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세기 전환기 파리에서는 르네 비비앙이 사포를 다시 불러내 여성 화자의 욕망을 프랑스어 시로 썼습니다. 누가 유파의 목록에 올랐는가는 작품의 밀도만이 아니라 이름이 어떻게 읽혔는가에도 달려 있었죠.
쓸모없음을 옹호한다는 것
세기말의 또 다른 얼굴은 데카당스(décadence)입니다. 위스망스의 『거꾸로』(À rebours, 1884)는 세상에 질린 귀족이 저택에 틀어박혀 인공만으로 감각을 조립하는 이야기로, 당대에 데카당스의 성서로 불렸습니다. 곧 반격이 따라와, 막스 노르다우는 『퇴화』에서 이 문학 전체를 병리 현상으로 진단합니다.
논쟁의 축은 하나였습니다. 예술은 무엇에 쓰이는가죠. 테오필 고티에는 쓸모 있는 것이 모두 추하다고 썼고, 월터 페이터는 『르네상스 연구』(1873) 결론에서 단단한 보석 같은 불꽃으로 타오르라고 적어 옥스퍼드의 젊은 독자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중 한 명이 오스카 와일드(1854~1900)였죠. 그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1891) 서문에서 도덕적인 책과 부도덕한 책이 따로 있지 않고 잘 쓴 책과 못 쓴 책이 있을 뿐이라고 선언했고, 프랑스어로 쓴 희곡 『살로메』(1893)로 상징주의와 직접 접속했습니다. 1895년 그는 동성애 혐의로 세 차례 재판을 거쳐 2년 중노동형을 받고, 감옥에서 쓴 긴 편지와 「레딩 감옥의 노래」(1898)를 남긴 뒤 파리에서 빈곤 속에 죽습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은 두 갈래로 읽힙니다. 검열과 효용 요구에서 예술을 지켜 낸 방어선이라는 독법이 하나이고, 톨스토이가 『예술이란 무엇인가』(1897)에서 공격했듯 특권층의 도피라는 독법이 다른 하나입니다. 이 논쟁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음 세기 문학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모더니즘 과목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인출 문제
생각해볼 질문 (정답 없음)
- 이름을 부르는 대신 암시하는 시는 독자를 창작에 참여시킬까요, 아니면 소수만 남기고 문을 닫을까요.
- 작가의 삶과 재판이 작품 평가에 얼마나 개입해도 되는지를 와일드의 경우로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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